[中 당대회 개막] 유물은 청산… 유산은 계승

입력 2012-11-08 21:45


57명과 8260만명.

중국공산당의 변화를 보여주는 숫자다. 57명의 당원이 모여 13명의 대의원을 선출하며 출범한 중국공산당은 이제 8260만2000명의 당원을 거느린 중국 ‘유일’의 중앙권력이 됐다. 말 그대로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한’ 대표적 사례다.

그 미약했던 시작은 초대 당대회부터 우여곡절을 겪는다.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의 루완(盧灣)구에서 개막했다. 당시 프랑스의 조계지였던 이곳에 20대 청년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전국의 공산당 대표자들이 당국의 눈을 피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대회 폐막 하루 전 프랑스군이 들이닥쳐 참석자들은 저장성 자싱(嘉興) 남호의 유람선 위에서 당대회를 마쳐야 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의 이합집산을 거치며 1925년 ‘국민혁명운동’ 결의를 통해 몸집을 키워 나간다. 중국공산당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당원과 민초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항일투쟁과 국공내전의 시련을 극복했고, 공산주의가 불가능해 보였던 20세기 중국에서 공산정권을 창출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혁명정당에서 집권정당이 된 중국공산당은 ‘계급정당’에서 ‘전 인민 정당’으로의 변화를 추구했다. 문화혁명의 소용돌이를 지나 1978년 개혁개방 선언을 전후로 중국공산당의 성격 변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1982년 당장(黨章)에는 ‘공산당의 전민성(全民性)’이 명문화되기에 이른다.

당의 성격 변화는 당의 구성 변화로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 당내 개혁파들이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강조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지식인과 실무관료들을 적극 흡수했다. 1949년 당시 당원 직업 분포에서 ‘지식분자’로 도외시되며 11.9%로 집계되던 지식·기술인들은 1987년에는 ‘테크노크라트’의 이름으로 전체 당원의 27.7%를 점유하게 된다. ‘혁명간부’ 세대로부터 ‘기술관료’ 세대로의 이전은 1990년대 이후 중국 제3세대와 제4세대 정치지도층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런 ‘전환’과 ‘변혁’은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새롭게 써왔다. 체제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과감하게 노선 전환을 추진했고, 역사적 과도기에 접어들 때면 변신에 가까운 자체 변혁을 추구했다. 혁명으로 태동한 정당이 혁명시기의 유물은 청산하고 유산은 계승하려는 노력도 이어왔다.

권력교체를 앞두고 중국공산당은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넘어 새로운 전환을 모색 중이다. 괄목할만한 양적 팽창을 이룩한 ‘중국특색 사회주의’가 앞으로 세련된 모습으로 질적 성장을 담보할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