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김지하와 박근혜
입력 2012-11-08 18:40
반체제 시인 김지하가 1970년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오적(五賊)’은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담시로 유명하다. 그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오적으로 표현하고, 이들이 장안에서 도둑질대회를 여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적의 부정부패와 방탕한 생활을 통렬한 해학과 풍자를 통해 폭로하고, 오적을 고발한 민초를 무고죄로 몰아 투옥시킨 포도대장을 오적의 주구로 묘사한다. 김지하는 오적과 포도대장이 벼락을 맞아 몰살하는 것으로 시를 맺는다.
큰 반향을 일으킨 ‘오적’으로 인해 김지하와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등이 구속됐고, 사상계는 정간됐다. 김지하는 도피 유랑 투옥 고문 등 형극의 길을 걷다가 80년대 중반 사면 복권된 뒤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 일부 진영은 그를 변절자라고 비판했다.
‘오적’은 선배들을 통해 후배들에게 전해졌다. 1979년 ‘12·12사태’로 득세한 신군부가 이듬해 5월 전국에 계엄령과 휴교령을 내렸을 당시 대학생들은 자취방에 모여 ‘오적’을 돌려보곤 했다. 많은 대학생들이 금서를 읽으면서 짜릿함과 권력 상층부를 향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탈하기 위해 강요한 을사늑약에 앞장선 대신 5명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른 데서 제목을 착안한 김지하의 ‘오적’ 이후 다양한 오적 시리즈가 나왔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신군부 실세를 지칭하는 ‘광주학살 오적’, 정부와 여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처리하려고 하자 당시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이 허무맹랑하게 주장한 ‘신묘오적’, 전북 임실군수들을 하차하도록 만든 토착 브로커 세력인 ‘임실오적’, 종합편성채널 선정을 무리하게 추진한다는 이유로 시민사회단체가 뽑은 ‘종편오적’ 등이 있다.
김지하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호평하고 무소속 안철수 후보를 깎아내렸다. 박 후보에 대해서는 “나는 민족과 세대, 남녀 전체가 여성 대통령 (후보) 박근혜의 노력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본다”며 “아버지를 놓아 버리고, 어머니 육영수를 따라서 너그러운 여성 정치가의 길을 가겠다는 것에 현실적 믿음이 간다”고 평가했다. 안 후보에 대해서는 “근 열흘 동안 무얼 보여줬는지…. 깡통이다”고 혹평했다.
유신독재에 맞서다 사형선고까지 받은 김지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을 치켜세운 것은 의외라는 시각이 많다. 과거를 접고 미래를 지향하는 몸짓인지도 모르겠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