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의심
입력 2012-11-08 18:30
며칠 전 어느 방송사의 토크쇼에 학력위조로 의심받았던 한 가수가 나와서 그간의 일들에 대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돈을 벌지 못해 느꼈던 가장으로서의 미안함,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죄책감,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며 법정까지 갔던 약 3년간의 진실 공방을 떠올리면 지극히 당연한 감정의 토로였다.
그런데 사건의 진원지인 인터넷 상에는 아직도 의심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 진실이라는 것이 그 사람들 손에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니 좀 불쌍한 생각마저 들면서 영화 ‘다우트(Doubt·의심)’의 인물, 알로이시스가 생각났다.
1964년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에 자리잡은 성 니콜라스 학교.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엄격한 규율로 아이들을 통제하는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는 흑인 학생을 받아들이고 학교에 새로운 자유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하는 플린 신부의 모든 것이 마땅치 않다. 어느 날 학교의 유일한 흑인 학생인 도널드가 수업 중에 플린의 방으로 불려가고 알로이시스는 플린을 소아성애자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알로이시스는 자신의 직관적 심증만으로 그의 모든 일상생활에 의심의 족쇄를 채워 확신으로 키워나가고 결백을 주장하는 플린을 몰아내기 위해 교회와 학교 속 모든 사람들의 삶을 뒤흔든다.
영화는 결백함을 믿어주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신부와 오로지 직관과 연륜을 앞세워 의혹을 사실로 끼워 맞춰가는 알로이시스,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의심이란 것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한 속박이 될 수 있으며 확신이 든다 할지언정 그것은 감정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그 지난한 감정싸움은 의심하는 사람과 의심받는 사람 모두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순간도 자신의 의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그렇게 애써 흔들림 없이 견고했던 알로이시스는 플린이 떠난 뒤 혼란에 가득찬 눈빛으로 울먹이며 말한다. “I have a doubt, doubt….” 누구에 대한 의심일까? 이번에는 자기 확신에 대한 의심, 자신에 대한 회의가 아닐까? 의심의 다른 이름은 불신이요, 확신의 다른 얼굴은 회의다. 그렇게 진실이 무의미해진 순간 남는 것은 허무와 상처뿐이다. 부디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믿음, 확실하지 않은 확신으로 더 이상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해치지 말기를 바란다.
김희성 (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