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38) 뽀얗게 증발하는 의식의 그늘 밑… 시인 이영광
입력 2012-11-08 18:27
몸보다 몸부림에 더 끌린 직관
광기로 가득찬 미당 극복 과제
이영광(48)의 고향은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골마을이다. 1975년에야 전기가 들어온 그야말로 벽촌이다. 부모는 아이가 얼마나 살지 알 수 없어 출생 신고를 2년 늦게 했다. 덕분에 첫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2003)에 적은 생년은 67년이다. 두 번째 시집부터 65년으로 바로잡았다.
‘직선 위에서 떨다’는 그가 군에서 제대한 20대 중반, 옥탑방에서 살면서 쓴 시이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던 시절, 한강을 왔다갔다 건너다보니 세상의 모든 다리가 직선이었다. 건축공학적 비용을 따져볼 때 직선의 다리가 가장 견고하고, 비용도 싸다는 것은 정한 이치겠지만 그 직선의 다리를 건너는 행위는 위험을 건너가는, 한 개인의 실존적 떨림 같은 것과 맞닿아 있다.
“고운사 가는 길/ 산철쭉 만발한 벼랑 끝을/ 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다// 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 이 먼 곳까지/ 꼿꼿이 물러나와/ 물 불어 계곡 험한 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 잡목 숲에 긁힌 한 인생을/ 엎드려 받아주고 있다// 문득, 발밑의 격랑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직선 위에서 떨다’ 전문)
그의 말대로 ‘떠는 것만이 진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진심은 직선 위에서 떨고 있는 의식의 표면 그 자체가 아니라 차라리 무의식의 심층에 더 가까울 것이다.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지만 영문학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그는 다시 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해 2006년, 미당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대학 시절에 이념의 세례를 받은 그는 한때 미당 시를 멀리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미당을 다시 붙든 것은 미당의 초기 시에 나타난 출구 없는 영혼의 몸부림과 자기 존재의 심연에서 모든 것을 내던져 회의하고 발광하고 포기하고 절규하는 참혹한 정열에 기인한다. 미당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물 속에 내재된 속성을 온 힘으로 통과하며 감각의 기화 상태를 겪기도 한다. 그 스스로 “의식이 뽀얗게 증발하는 느낌”이라고 말하는 지점이다.
“나무는 미친다 바늘귀만큼 눈곱만큼씩 미친다 진드기만큼 산 낙지만큼 미친다 나무는 나무에 묶여 혓바닥 빼물고 간다 누더기 끌고 간다 눈보라에 얻어터진 오징어튀김 같은 종아리로 천지에 가득 죽음에 뚫리며, 가야 한다 세상이 뒤집히는데// (중략)// 미친 나무는 푸르다 다 미친 숲은 푸르다 나무는 나무에게로 가버렸다 나무들은 나무들에게로 가버렸다 모두 서로에게로, 깊이깊이 사라져버렸다”(‘나무는 간다’ 부분)
2011년 미당 문학상 수상작 가운데 한 편이지만, 여기서 몸(나무)과 정서의 관계는 긴밀하다. 의식을 무너뜨리고 정신을 조금 잃은 상태랄까. 그런 상태에서 어떤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 적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는 신체의 지각을 받아 적는 일과도 상통한다. 내면의 혼돈이든 무의식이든 이런 저런 영감들을 직관으로 잡아채 시를 쓴다는 측면에서 그는 미당의 계보에 속한다.
그에겐 어떻게 미당이라는 한 사람 안에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능력과 정치적 과오를 저지른 흠결이 공존할 수 있는지가 늘 관심사였다. 결국 그는 그 원인을 미당 내면의 심층 충동이나 욕망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국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그는 ‘미당 극복’이라는 명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다. 올 초 쓴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이 사이코 노인네하곤 그만 인연을 끊자/ 시선(詩仙)은 무슨, 몸 바친 혼은 다 넝마야// 하지만 내 안의 시인이 연구자를 이겼네// (중략)// 그 스물셋 미친 아이는 어떻게 기어코 제 정신의 시를 썼던가/ 이것이 사람 말일까 싶은 사람의 말을 했던가”(‘공중의 인터뷰’ 부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