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3) 아버지, 베드로처럼 살라고 이름을 ‘피득’으로
입력 2012-11-08 17:53
아버지는 우리 형제에 돌림자인 ‘원’자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신앙적 소신에 따라 형님의 이름을 빌립을 뜻하는 필립(必立)으로, 나는 베드로를 뜻하는 피득(彼得)으로 지으셨다.
아버지는 내게 베드로처럼 반석 같은 믿음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온몸으로 주님을 사랑하라고 지어주신 것 같다. 사라가 100세에 이삭을 가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어머니는 나를 46세에 가지셨다.
어렸을 때 이름 때문에 많은 놀림거리가 됐지만 피득이라는 이름은 내 삶에 보이지 않는 ‘채찍’이 됐다. 이름은 정말 유혹에 이끌리거나 혈기가 넘친 나머지 거친 언행을 할 때, 정의로운 결단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 나를 단단히 잡아줬다.
1947년 월남해서 보니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은 거의 서울에 몰려 있었다. 우리 집은 용산에 있던 신사자리에 마련된 피난민촌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천막이라고 해봐야 큼지막한 미군 천막에 가마니를 깔고 네 집이 함께 살았다.
남대문 시장에 가보니 사고파는 사람이 전부 피난민이었다. 서로 하루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밀치고 싸우는 광경을 보니 16살 어린 나이에 ‘이처럼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늘 앓아누우셨다. 형님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책을 읽을 땐 항상 코앞에 대고 읽을 정도였다. 아버지 역시 연세가 많으신 데다 귀가 좋지 않아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집안을 책임져야 할 하루 종일 시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무엇을 해서 식구들의 생활비를 조달해야 하나’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러던 중 감사하게도 아버지가 30년 만에 미국 에즈베리대학교 재학 시절 같이 공부하던 정남수 목사님을 만나게 됐다. 소복호텔을 경영할 정도로 부자였던 정 목사님은 우리 집의 딱한 사정을 듣고 아버지를 호텔에 취직시켜 주셨다. 나도 손님의 신발을 받아 신발장에 넣어뒀다가 손님이 나갈 때 재빨리 갖다 주는 허드렛일을 했다.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시절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한 사람과 끝까지 학업을 마친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필립 형님과 나는 무척 우애가 좋아서 서로를 아꼈다. 형님은 머리가 무척 좋아 창세기를 술술 외웠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1950년 5월 29일의 일이다. 형님이 친구들과 서울 마포 부근 한강에서 물놀이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마침 그 지역은 골재채취를 하는 지역이어서 강바닥이 움푹 파인 곳이 많았다. 형님의 친구들은 한참 물놀이를 하다가 형님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날 형님은 날이 저물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한강에서 젊은이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는 허겁지겁 마포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가마니를 뒤집어보니 형님이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었다. 온 세상이 검게 변했다.
“필립형! 제발 일어나. 형, 지금 자고 있는 거지. 이렇게 가면 어떡해. 엉엉엉.” 아는 분이 허름한 관을 어디서 구해주셨다.
관을 나무수레에 싣고 마포에서 망우리 고개까지 갔다. 그리고 야산에 형님의 시신을 묻었다.
나는 큰 충격에 빠져 삶의 의미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슬픔을 딛기도 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3일 만에 인민군 탱크가 서울에 들어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