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2) 광복 기쁨도 잠시… 공산당 핍박에 온가족 南으로
입력 2012-11-07 18:13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1930·40년대만 해도 예배당 한가운데 커튼이 있었다. 남녀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논리 아래 오른쪽에는 남자, 왼쪽에는 여자가 앉았다. 신의주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선천은 신앙 열기가 무척 뜨거웠는데 이웃 교회에서 사경회를 한다는 소문이 나면 10㎞ 이상 걸어서 부흥회에 참석했다.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셨던 아버지는 주일마다 가족예배를 인도하셨다. 아버지의 신앙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예수를 믿게 됐다. 아버지 덕택에 생계를 유지하게 된 삼촌들도 한분만 빼놓고 모두 예수를 믿었다.
우리 가정은 격동기 한국역사와 희로애락을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아버지가 독립투쟁을 한 것이나 공산당의 핍박에 못 이겨 월남한 게 그것이다.
1945년 감격스런 해방의 기쁨을 맛보고 2년도 채 안 돼 우리 가정은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이북지역은 공산당의 통치아래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공개적으로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공산당이 민주당을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지주들은 공산당에 끌려가 두들겨 맞거나 어이없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아버지는 동네 초등학교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으셨다.
“이곳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다. 공산당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절대 이상적인 사상이 아니다. 공산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쪽으로 모두 가자!”
아버지는 비장한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시 분위기에서 월남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동네에 차씨가 80%이상 거주하고 있었는데, 씨족사회 특성상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과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교회 목사님께도 월남하자고 간청하셨다. 당시 가물남교회는 이성주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산당의 핍박은 심해졌다.
“목사님, 하루빨리 이곳을 떠야 합니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날이 곧 올 겁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져도 저 많은 양떼를 두고 월남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정 가시려면 장로님만 내려가세요.”
월남할 때 같이 내려오지 못한 가족 중 하나는 친누나다. 당시 출가했던 누나를 데려온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결국 우리 가정만 내려왔다. 훗날 수소문 끝에 목사님과 누나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목사님은 가물남지역 모나자이트 광산으로 끌려가 광석채집 노역에 처해졌다고 한다. 주일날까지 강제 노역을 시켰던 공산당에 맞서 ‘평일 날 책임량을 해내고 주일을 지키게 해 달라’고 맞섰다고 한다. 하지만 목사님은 6·25전쟁 당시 공산군이 북쪽으로 퇴진할 때 야산으로 끌려가 죽창에 무자비하게 찔려 순교하셨다고 한다. 누나 역시 탄광에서 3인1조가 돼 일을 하다가 ‘왜정 시절 친정도, 시집도 괜찮게 살았다’는 말을 동료에게 했다는 이유로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아버지가 공산당에 끌려가 매를 맞았던 사건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만약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월남을 주저했을 것이다. 1972년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목사님 걱정을 했다. 평생 죄책감을 지니셨던 것 같다. “피득아, 내가 그때 억지로라도 목사님을 모시고 왔어야 했다. 양떼를 끝까지 지키신 목사님은 날 보고 장로가 되어 저 혼자 도망갔다고 하지 않았겠느냐.”
피난한 우리는 서울 용산 야스쿠니신사가 있던 자리에 생긴 선천 피난민촌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미국 망명생활 때 만난 지인의 도움으로 소복호텔에서 경리로 일하셨다. 그렇다고 월남한 우리 집안에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건은 6·25전쟁 발발 며칠 전에 발생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