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文·安 대선 전쟁] 2002년 ‘사람의 단일화’ 2012년 ‘가치의 단일화’
입력 2012-11-07 00:12
‘사람’의 단일화와 ‘가치’의 단일화. 2002년 노무현·정몽준, 2012년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의 가장 큰 차이다. 다시 막이 오른 한국 정치판의 단일화 드라마는 10년이란 시간만큼 진화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6일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단둘이 만나 ‘국민연대’에 합의했다. 이회창 대세론에 맞설 후보를 단순히 1명으로 줄이는 일이었던 2002년의 ‘실패한 단일화’를 넘어서기 위해 ‘가치와 철학을 함께하는 단일화’란 목표를 내세운 것이다.
2002년 단일화는 ‘정치 공학적’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진보 성향의 노 후보와 보수색 짙은 정 후보가 대선 승리 공식에 따라 추진한 인물 결합이었다. 결국 정 후보가 대선 하루 전날 정책 불화를 이유로 노 후보 지지를 철회하며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1+1=2’가 되지 못한 상황을 보며 이회창 후보는 “안 될 게 됐던 것”이라고 조소했다.
문 후보는 당시 단일화 결렬 사태를 노 후보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이번 대선에 출마하며 그가 내세운 단일화 명분은 단순한 연대를 뛰어넘는 ‘공동정부론’이다. 이는 안 후보가 주장한 ‘가치와 철학의 공유’란 조건과 일맥상통했다. 여기에 새누리당 정권의 교체라는 공동 목표가 더해져 ‘1+1=3’이 되는 단일화를 시도하고 있다.
2002년에는 노·정 후보 대리인이 먼저 이견을 조율한 뒤 두 후보가 만나 단일화 원칙에 합의했다. 이번에 양측 비서실장이 한 일은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 것뿐이다. 별다른 사전 조율이 없었지만 문·안 후보는 2시간 만에 7개항 합의문을 만들어냈고 그 문서에 ‘양쪽 지지자들을 모아내는’이란 표현을 담아 새로운 형태의 단일화 의지를 명문화했다.
10년 전 노·정 후보는 단일화 뒤 공동 집권 구상을 진지하게 토론할 시간이 없었다. 사람의 단일화에 급급해 집권 이후에 대해선 ‘느슨한 약속’에 그쳤다. 문·안 후보는 단일화 방식은 뒤로 미룬 채 ‘새 정치 공동선언’부터 만들기로 했다. 가치에 대한 합의를 통해 한쪽이 파기하기 쉽지 않은 구속력부터 갖추려 한다. 따라서 단일화의 결과물도 2002년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두 후보가 단일화를 위한 첫 만남의 장소로 백범김구기념관을 고른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활약했던 임시정부는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표현으로 담겨 있다.
문 후보 측 진성준 공동대변인은 회동에 앞서 “대한민국 헌법정신은 임시정부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가치와 철학을 공유하는 회담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선택에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의 차별화도 고려됐다. 문 후보는 지난달 26일 박 후보가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하자 효창동 애국지사 묘역의 김구 선생 묘소를 찾아 헌화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