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차피득 (1) 내 삶의 뿌리는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주님 사랑
입력 2012-11-06 18:06
㈜한국필름을 운영하며 지난 40년간 인쇄용 필름 공급은 물론 디지털 인쇄기를 국내에 보급하면서 인쇄산업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복은 민족의식으로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다.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젊은 시절 독립운동과 미국 유학 경험이 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아버지 차희선 장로님은 1910년 105인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를 정로도 민족의식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당신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9세부터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신식학문을 접하게 됐다. 선교사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게 됐고 독립운동에도 가담하게 됐다.
아버지는 옥고를 치른 뒤 1914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신규식 선생의 도움으로 그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애즈베리대학교에 다니다 1919년 3·1운동과 함께 학업을 중단하고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합동상사를 설립했다.
아버지는 1924년 귀국 후 숭신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가남상회를 경영했다. 미국에서 활동하실 때 고국으로 송금했던 돈은 우리 가정은 물론 가문을 일으킬 정도의 종자돈이 됐다. 가남상회는 인근 3개면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백화점과 같은 곳이었다. 고무신부터 쌀, 포목, 우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검소하게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독립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셨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보다는 동네 사람들을 도우면서 교회를 섬기는 데 힘쓰셨던 것 같다.
“피득아, 교회 유리창이 깨지고 기왓장이 떨어지면 사다리를 타고 이렇게 고치는 거란다.” 아버지는 교회의 깨진 유리창을 손수 고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을 고치셨다.
귀국 후 아버지는 일부러 자신의 독립의지를 표출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늘 삼엄한 감시 속에 지내셨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신의주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43년의 일인 것 같은데 하루는 산골짜기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태극기를 꺼내 보이셨다. “이게 뭔 줄 아니,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태극기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천에 직접 그린 태극기를 보여주셨다. 그 당시 나는 국가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때라 그 사건을 그냥 무덤덤하게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태극기를 보여주는 행동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꼈다.
1944년에는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빼앗아가기 위해 아버지를 이장에 앉혔다. 동네사람들의 창고를 뒤지는 공출을 피하고자 아버지는 대단한 결정을 했다. 이장을 맡지 않기 위해 우리 가문이 대대로 살던 집을 버리고 읍내로 이사한 것이다.
1926년 가물남교회에서 장로로 취임한 아버지는 평생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이른 나이 미국 유학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웃간네’로 불리던 어머니에게 정애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한글을 가르친 사람도 아버지였다.
◇약력 =1932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 신흥교회 원로장로, 61년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73년 대호무역 대표이사, 75년 한국필름 대표이사, 98년 한국필름 명예회장, 2008년 정마을사람들 회장, 2011년 바른마음갖기회 회장, 저서 ‘미꾸라지 진짜 용된 나라 대한민국’ 29만부 발행·배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