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근미] 빌미를 제공하지 말자
입력 2012-11-06 19:07
상실감, 인간이 잘 다루지 못하는 감정 중의 하나이다. 금방 산 물건을 잃어버리면 상실감 지수가 최고조로 올라가서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해진다. 며칠 전 은행자동화기기에 상점에서 막 계산을 치른 물건을 놓고 온 일이 있었다. 잠시 후 그 사실을 깨닫고 달려갔으나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유리문 바로 앞에 있는 경비아저씨를 그냥 지나쳐버린 범인(?)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분기탱천하여 셔터가 내려진 은행 안으로 들어가 CCTV 확인을 부탁하고 돌아왔다.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더니 끝까지 추적하여 물건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물건을 가져간 사람은 점유 이탈물 횡령죄에 걸리고, 원할 경우 처벌도 받는다는 친절한 답변도 있었다.
은행에서 중년여성이 가져간 걸 확인하고 연락해 봤으나 전화번호가 바뀐 상태였다고 알려주었다. 경찰이 요청한다면 모를까,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하다고 덧붙였다. 생각 같아서는 경찰서로 바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강력사건이 뻥뻥 터지는 마당에 물건 하나 찾겠다고 경찰을 바쁘게 하는 건 시민 된 도리가 아닌 듯했다. 물건을 단념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 때문이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을 어기게 한 걸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강력 사건이 많이 터져 뉴스 보기가 겁난다고들 한다. 사건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피해자가 빌미를 제공한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늦은 밤에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다가 강도에게 당한 여자, 술을 많이 마시고 길바닥에서 자다가 아리랑치기를 당한 남자,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다가 몰카에 찍힌 여자 등등.
좀더 범위를 넓히면 과도한 흡연을 하다 건강해치는 경우, 비만을 방치하다 위험수위를 넘기는 경우, 주식을 제대로 모르면서 직접 투자를 한 경우 등등 스스로가 빌미를 제공하다 삶의 역풍을 맞는 일이 허다하다.
‘빌미 제공’은 ‘마귀가 틈탄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마귀는 밝은 사람을 어둡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슬픔에 빠진 사람을 우울의 늪에 밀어 넣을 수는 있다고 한다. 빌미를 제공하고 틈새를 보이고 있지나 않은지 나를 철저하게 관리해야겠다. 성공노하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위기관리이다. 작은 빌미, 조그만 틈새를 깔끔하게 방어해 겨울을 따뜻하게 맞이할까 싶다.
이근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