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산업화·민주화시대 너머로 가는 길
입력 2012-11-06 18:33
“치유·배려·소통·포용·공존 등 여성성의 잣대로 후보들의 공약·행보 따져봐야”
여성할당제의 기계적인 적용은 경계해야 한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여권신장을 강화하자는 선의의 주창이 충분한 여성 인력풀이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자칫 ‘깜’도 안 되는 인사들이 여성 몫이랍시고 등장하는 폐단을 방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론도 예상된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여성은 남성중심사회의 들러리로서만 자리매김해야 하나, 여성할당제가 그나마 여성 권익신장에 기여하는 게 아닌가, 더구나 지금 모든 분야에 여성할당제가 뿌리내린 것도 아닌데 재부터 뿌리느냐, 오히려 제도를 더욱 강화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근본 문제는 할당제 여부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인식에 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베티 프리단은 여성해방운동의 기초학습서로 유명한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1963)에서 여성이 성차별을 겪게 되는 것은 여자는 이래야 되고 여성은 이런 것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 즉 ‘여성이라는 신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일찍이 간파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는 부정적인 의미다. 신비가 여성을 제한하고 규정하는 차꼬로서 남녀 모두에게 채워졌다는 것이다. 프리단이 흑인여성 문제를 외면하는 등 엘리트 페미니즘을 벗지 못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출간 후 반세기가 다 됐어도 그의 주장은 한국사회에서 아직 유효하다.
더구나 한국은 산업화·민주화시대 너머로 가려는 시점이기에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돼 있는 낡은 ‘신비’를 걷어낸다는 차원에서 프리단의 주장은 더욱 새롭다. 과거 산업화·민주화시대의 주역은 강력한 추진력으로 무장한 가부장제 하의 고지점령지상주의에 매몰된 근육질의 남성성으로 요약되는데 그 잔영이 아직도 남은 까닭이다.
그런데 18대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내놓고 있는 주장은 복지사회와 경제민주화의 실현이다. 정치쇄신이란 말도 나오고 있지만 핵심은 복지사회와 경제민주화로 요약된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남성성이 주로 추구해왔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슈다. 그것은 바로 여성성의 문제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치유와 배려, 소통과 포용, 공존과 공생을 전제로 한다. 지금까지 민주화는 주로 정치민주화를 뜻했고 그것은 정치적 자유로 요약된다. 반면 경제민주화는 경제적 약자들에 대해 배려를 하자는 것이기에 시장경제체제의 자유보다 제한을 강조한다. 겉으로는 자유를 제약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체제의 고질, 이른바 시장실패를 해소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목표보다 과정을 중시하며 양보와 소통에 초점을 맞춰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일 등이 다가올 미래 사회의 주요 과제라는 뜻이다. 이는 가부장적인 지배와 같은 완력에 의한 억압으로 상징되는 남성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덕목이다. 여성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모든 남성이 곧 남성성의 소유자이며 모든 여성이 여성성을 발휘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박근혜 후보가 여성대통령 운운하면서 은근슬쩍 ‘여성=여성성’을 내세운 듯하나 그것은 지나친 아전인수식 주장이다.
박 후보가 여성성의 담지자인지 남성성에 매몰돼 있는지는 그가 걸어온 행보며 주장에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의 대선 승리 목표가 독재와 산업화, 즉 남성성의 대표 격인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복권 또는 아버지가 추구했던 가치의 재현에 있는지 아닌지는 유권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분명한 것은 치유와 배려, 소통과 포용 등이 가능한 것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성의 여부에 달렸다는 점이다. 대선후보 선택기준도 좌우를 구분하는 이념, 지연·학연,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남녀라는 차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번 18대 대선이야말로 낡은 ‘신비’를 떨쳐내고 여성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후보들의 공약과 행보를 따져봐야 한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