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여성 대법관

입력 2012-11-06 18:33

우리나라의 첫 여성판사는 황윤석씨다.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54년 판사로 임용됐다. 서울지방법원에서 근무하다 7년 만인 1961년 숨졌다. 진명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4세에 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법조인이었기에 그의 사망소식에 많은 사람이 슬퍼했다.

충격도 컸다. 최종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아내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고 남편이 구속됐던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장학회 출범식에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판사가 될 뻔했던 여성이 있었다. 바로 이태영씨다. 고인은 황윤석 판사보다 한 해 앞서 고시에 합격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그를 판사후보 명단에 담아 임명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올렸다. 그때 이 대통령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여성은 아직 이르니 가당치 않다.”

이 대통령은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정일형씨의 아내를 판사로 임용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변명으로 여성을 운운했다. 하지만 그 변명이 통했던 때였다.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의 대모였던 고인에게는 첫 여성법조인, 첫 여성변호사 등의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러나 첫 여성판사는 후배에게 양보해야 했다.

어느 나라나 법조인 사회는 보수적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건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공정하게 판단하려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여성에게는 치명적이다. 미국에서도 첫 여성 연방대법관은 1981년에야 나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유세를 하면서 여성 연방대법관을 임명하겠다는 공약을 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임명된 사람이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다. 지금은 연방대법관 9명 중 3명이 여성이지만 취임 당시에는 말이 많았다.

영국은 더 심했다. 첫 여성대법관인 브렌다 헤일은 2004년 임명됐다. 물론 2009년 대법원이 상원에서 분리되기 전까지 대법관은 귀족인 상원의원이 맡았던 특수한 제도의 영향이 컸다. 그래도 영국은 세계에서 여성 법관의 비율이 가장 낮은 축에 든다.

5일 김소영 대법관이 취임했다. 김영란, 전수안, 박보영 대법관에 이어 네 번째 여성 대법관이다. 그는 취임할 때 “소수자의 작은 목소리라도 성의를 다해 듣겠다”고 했다. 여성 대법관에게 기대가 큰 이유는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을 더 잘 살필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동시에 여성 대법관 임명이 화제가 되지 않는 시대, ‘여성성’을 놓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