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추위에 막막했는데” 79세 할머니 얼굴에 온기가…
입력 2012-11-05 19:01
본보 이사야 기자 중계본동 산동네 연탄배달 동행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5일 아침. 서울 중계본동 27번지 104마을 주택가 곳곳에는 연탄재가 뒹굴고 있었다. 판잣집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이 대부분이고 폐가처럼 보이는 곳도 적지 않았다.
1960년대 서울 전역에서 재개발 바람이 불 때 용산, 동대문, 청량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은 이곳 불암산 기슭까지 쫓겨와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온 동네 집주소가 ‘산104번지’로 끝난다고 해서 104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지금 마을주민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마을의 1600가구 중 600여 가구가 연탄을 땐다.
한국수출입은행 ‘나눔봉사단’ 30여명이 104마을 어귀의 서울연탄은행 앞에 모였다. 조를 나눠 104마을 가정 10곳에 연탄 2000장을 배달하기 위해서다. 우선 3.6㎏짜리 연탄 140장을 리어카 두 대에 옮겨 실었다. 동네 길이 워낙 좁아 트럭 대신 리어카나 지게로 연탄을 옮겨야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이승년(79) 할머니 댁. 6∼7명이 달라붙어 리어카를 밀며 50여m를 갔다. “자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연탄은행 허기복 대표가 말했다. 왼쪽 골목을 보니 경사 45도 가량의 언덕이 70m 정도 뻗어 있었다. 이 할머니 집은 언덕 끝.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있는 힘껏 리어카를 밀어 겨우겨우 언덕 끝에 올랐다. 다리는 풀리고 팔은 덜덜 떨렸다. 불도 없이 컴컴한 슬레이트 지붕 밑에 앉아 있던 이 할머니는 “안 그래도 연탄이 딱 떨어져 막막했는데 정말 고맙다”며 연신 손뼉을 쳤다. 청계천 철거민 출신인 이 할머니는 “남편 자식들 다 죽고 폐지 주우면서 나 혼자 여기서 20년 넘게 살았다”며 “가끔씩 봉사하러 찾아오는 이들이 더없이 반갑다”고 말했다.
빗방울이 굵어져 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초조한 듯 연탄은행 앞으로 박태자(76) 할머니가 뛰어왔다. “11시까지 온다고 했으면서 왜 안 와. 우리 아들 추워.” 봉사단원들은 지체 없이 지게에 각자 연탄 4개씩을 지고 박 할머니를 따랐다. 미로 같은 골목과 가파른 언덕을 지나 박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사고로 거동이 불편한 아들 재형(49)씨가 추울까 한걸음에 달려온 어머니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박 할머니는 “시집오자마자 시댁이 용산에서 쫓겨 와 여기서 50년을 살았다”며 “가진 것 없어도 아궁이에 연탄 4장만 채워 넣으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했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미안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김상연(83) 할아버지와 주하순(76) 할머니는 마당에 쌓인 200장의 연탄을 보며 “겨울에는 폐지와 공병 줍는 일도 힘든데, 연탄도 채워졌으니 서로 의지하며 올 겨울도 잘 버텨봐야지”라고 말했다.
세 번째 배달을 마쳤을 무렵 다른 조들도 배달을 마쳤다는 연락이 왔다. 나눔봉사단은 이날 연탄 6만장을 연탄은행에 기증했다. 봉사를 함께한 김용환 수출입은행장은 “성큼 다가온 추위 때문에 소외된 이웃들의 겨울나기가 걱정된다”면서 “오늘 전달한 연탄이 이분들이 겨울을 나는데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