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뛰었다… 사랑 나눈 뉴요커들

입력 2012-11-05 18:39


허리케인 ‘샌디’가 할퀸 상처를 뉴욕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마라토너들이 보듬어줬다. 뉴욕국제마라톤 참가 예정자들이 구호물자를 가득 담은 배낭을 메고 달리며 고통에 신음하는 뉴욕 시민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전한 것이다.

뉴욕시 스테이튼아일랜드의 베라자노 브리지는 뉴욕국제마라톤 출발 지점이다. 하지만 4일(현지시간) 열릴 예정이던 마라톤 대회는 36시간 전 취소됐다. 뉴욕 등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모여든 프로 및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들은 이날 또 다른 의미의 26.2마일(42.195㎞) 마라톤 행사를 가졌다.

마라톤 참가자들의 옷차림은 남달랐다. 가슴엔 참가번호를 달고 마라톤 대회 참가자를 뜻하는 오렌지색 셔츠를 입었지만 각자 배낭을 메고 쓰레기봉투를 들었다.

이들은 넋을 잃고 있던 주민들에게 다가가 잔해를 치우고 쓰레기를 주웠다. 저마다 배낭에서 음식과 물, 기저귀, 동물사료, 담요를 꺼내 주저앉아 있던 주민들에게 건넸다. 어떤 이는 홈디포(주택수리 전문점) 상품권을 돌리며 달렸고, 다른 이는 30㎏이 넘는 구호물품을 담은 여행가방을 끌고 주택가를 누볐다. 건전지를 배낭에 담고 달린 이도 있었다. 진흙에 빠진 곰인형을 씻기도 했다. 마라토너 존 베넌은 “이번엔 전혀 다른 마라톤이었다”며 “주민들의 걱정과 근심이 위로와 안정으로 바뀌는 걸 봤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마라톤 참가 예정자 수천명이 주민 돕기에 나서는 등 마라톤을 자선과 구호의 기회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참가자는 대부분 뉴요커였지만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노르웨이인 벤테 스카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금메달리스트다. 그는 “마라톤은 꼭 참가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도움을 주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마라토너 몇몇이 전날 페이스북을 통해 주민 돕기에 나서자며 시간을 정했다. 이 소식이 퍼지면서 당초 300명으로 예상됐던 자선 마라톤 참가자들이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샌디로 보금자리를 잃은 러시아 이민자 알렉산드르 베르세네프는 이들을 맞이한 뒤 “웃음을 잃지 않고 나를 도와준 이들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의 손길은 스테이튼아일랜드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뉴욕 퀸스에도 온갖 구호물자를 가득 실은 자동차 행렬이 이어졌다. 어린이들은 돼지저금통을 깬 돈으로 산 건전지를 건넸고, 구호센터에는 담요와 생수를 포함한 생활용품들도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NYT는 전했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