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놀랍게 성숙해진 독일 사회

입력 2012-11-05 19:07


“베트남 출신의 의학도를 부총리 자리에… 폐쇄성 극복이 선진국가 이르는 길”

1960년대에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로 여행을 가면 이웃나라인 독일보다 훨씬 개방적이어서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곤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음식문화가 아닌가 싶다. 네덜란드에는 인도네시아 식당과 중국 식당, 벨기에에는 아프리카 식당이 즐비했다. 프랑스에서는 중동이나 베트남, 중국, 아프리카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데 비해 독일에서는 선택의 폭이 아주 좁았다. 식탁 풍경이 단색적이랄까.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동안 식민지를 통치하며 여러 문화권과 인적 교류를 활발하게 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독일은 다른 나라를 지배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처럼 독일이 단색적인 사회풍토가 된 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독일의 역사적 멍에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당시 독일 사회의 내성적 정서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1970년대 필자가 오랜 독일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할 때 독일이 당시 미국 사회만큼만 개방적이었다면 스승의 권유대로 그곳에 계속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만인이 선망하는 교수 자리를 얻어 희망찬 미래를 보장 받고도 당시 독일 사회의 폐쇄성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그러한 독일 사회가 한 세대를 거치면서 지난 30년간 엄청나게 변화했다. 1990년 통일 이전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로 독일 내각을 이끌고 있다. 또 올 3월에는 공산 치하에서 인권운동을 했던 목사 출신 요아힘 가우크가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기도 했다. 두 명 모두 통일 이전 옛 동독 출신이다.

거기에다 현재 독일 내각의 부총리인 필리프 뢰슬러는 태어난지 9개월만에 베트남에서 독일 가정으로 입양되어온 해외 입양아 출신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독일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이며 관대하게 변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뢰슬러 부총리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의학도다. 그는 일찍이 진보적인 자유당(FDP)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자유당이 기독민주·사회당(CDU·CSU)과의 연정(聯政)을 구성하면서 뢰슬러는 보건장관을 지냈다. 지난해에 당 대표에 선출됨에 따라 자연스레 독일 연정 내각에서 경제 및 기술부장관을 겸직하는 부총리까지 오른 것이다.

1970년대 독일 사회의 저변에 흐르던 폐쇄적인 정서를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변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회가 흔히 가질 수 있는 편견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기야 흑인혼혈인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놀라운 미국 사회도 있지만.

지난 총선에서 필리핀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이자스민씨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우리 국회에 입성했다. 이 의원에게 따뜻한 격려와 많은 찬사가 쏟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폐쇄적이며 저속한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짙은 폐쇄성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폐쇄성이라는 것은 ‘편견과 오만’이라는 단어와 관련되기 때문에 더욱 우려되는 부분이다.

목숨을 걸고 탈북해 우리 곁에 온 새터민들과 결혼 이주 다문화가족을 비롯해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재중(조선족) 교포들, 동남아시아 등 저개발국에서 온 산업현장의 외국 근로자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정신적·육체적 장애인들을 편견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줘야 할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야 한다. 폐쇄성을 극복한 편견 없는 사회가 진정 아름다운 선진사회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진화를 이뤄낸 독일 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단색의 식탁문화에서 먹을거리가 한층 다양하고 화려해진 식탁 문화로 바뀐 의미가 각별하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도 독일처럼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신우일신의 분위기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