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지적장애인’에 끝까지 귀 기울인 법원

입력 2012-11-04 20:08

지적장애 1급(IQ 34 이하)인 A양(14)은 2003년부터 어머니와 동거를 시작한 B씨(53)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과 폭행을 당했다. 어머니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B씨는 술만 마시면 A양을 학대했다. A양의 성폭력 피해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해 11월 A양이 다니던 특수학교 수업 도중이었다. A양은 ‘냉장고에 무엇이 있나’라는 질문에 답변하다가 불쑥 B씨의 성폭력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이를 심상찮게 여긴 담당교사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수사는 녹록지 않았다. 지적장애를 가진 A양의 피해 진술은 일관되지 않았다. 특히 ‘언제’ 성추행을 당했는지에 대한 진술이 자주 바뀌었다. A양은 피해 시기와 관련해 “작년(2010년) 여름”이라고 진술했다가 ‘작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했다. 다시 “여름방학이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말하면서도 “긴 내복을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검찰은 A양의 진술 흐름으로 볼 때 성추행뿐 아니라 성폭행도 당한 것으로 보고 B씨를 기소했다.

사건을 받아든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부장판사 천대엽)는 난감했다. 일반 형사사건에서 피해 시기가 구체적이지 않으면 대부분 무죄가 선고된다. 그렇다고 진술이 중요한 증거가 되는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을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법원이 선정한 전문심리위원 김태경 백석대 교수에게 A양과 면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 교수는 두 차례 면담 끝에 A양이 “시간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 과거의 상황을 현재의 틀 안에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직접 경험한 독특하고 스트레스가 큰 사건을 추후에 회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지능력은 갖추고 있다”며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문제가 됐던 시점에 대해서는 2009년 겨울방학(2009년 12월∼2010년 1월)으로 특정했다.

재판부는 지난달 30일 B씨에게 13세 미만 아동의 강제추행 범죄에 대해 가능한 형량 중 가장 높은 징역 7년을 선고했다고 4일 밝혔다. 재판부는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정도의 논리·합리성이 결여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전제했다. 이어 “피해 상황에 대한 진술은 비교적 일관성이 있고, 지적장애인의 인지적 특성에 정통한 전문심리위원의 결론도 이와 일치한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다만 B씨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범행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도가니 사건’ 피해자들의 변론을 맡고 있는 이명숙 변호사는 “도가니 사건 이후 지적장애인들의 특수성을 감안해 진술 신빙성을 판단하려는 법원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판결”이라며 “전문심리위원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활용하는 등 법원의 지적장애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