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규태 (11) 6·25 와중 박목월 시인 등과 종군작가단 구성
입력 2012-11-04 18:23
6·25 전쟁 당시, 강원도 산악 지대에서는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피란길에 국민방위군에 징발돼 강릉 비행장 방위에 투입되었다가 포탄 파편에 맞았다. 이후 후방으로 옮겨져 마산 공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까닭에 공군에 편입된 후 대구에 있는 공군정훈감실에 배속됐다.
당시 대구에는 많은 문인들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도 청록파 시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종군작가단을 조직하는 데 일조를 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코메트’라는 문예지의 편집 일을 맡으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그런 인연으로 1950년대 말에 박목월 시인과 함께 한양공과대학에 임용돼 국문학과를 창설하는 데 참여했고, 한편으로 초대 ‘한양대신문’ 주간이 되기도 했다.
박목월 선생님은 늘 내게 서사시나 담시(譚詩)를 써보라고 권유했고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김연준 총장님은 신앙시를 써보라며 작곡도 해주시겠다고 독려해 한때 시 창작을 왕성하게 했다.
한양대 국문과에서 처음으로 이승훈 시인이 배출됐고 그 제자인 최승호 시인이 그 당시 베스트 셀러 메이커인 도서출판 고려원의 편집장이 된 덕택으로 나는 그곳에서 서사시집도 냈다. ‘내 사랑 너를 위하여’라는 에세이집도 출판해 적잖은 인세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이 책의 첫머리는 내가 젊은 시절에 실연당했던 얘기로부터 시작한다. 실연당한 까닭은 신문 기자라는 내 직업을 트집 잡아 상대방 부모가 적극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아픔을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해 나는 무척이나 소상하고 설득력 있게 써나갔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책을 읽고 실연의 상처를 깡그리 치유했다는 아마도 소녀인 듯한 독자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또한 그녀는 이 책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준 대목도 크게 마음에 와 닿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고향인 여수에 내려 올 일이 있거든 꼭 연락해 주기를 바랐고, 여수의 갓김치를 버무린 해산물을 대접하겠다며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는 몇 달쯤 지난 후 나는 마침 순천의 한 문학 세미나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고 그때 문득 여수의 ‘팬’ 생각이 떠올라 소녀를 찾아 갔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받쳐 들고 오동도 다리를 함께 거닐었던 시간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또한 허름한 다방에 앉아 차를 나누면서 아직껏 가시지 않은 사랑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면서 흐뭇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하지만 헤어질 때 그녀는 몹시도 서운하고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며칠 후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교수님께서 워낙 여행을 좋아하신다기에 한려수도의 빼어난 절경을 누비고 백도에서 1박을 함께 했으면 했는데 고만 날씨가 심술을 부려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엔가 또 문득 다시 여수에 오시는 날에는 꿈꾸기만 했던 백도에 꼬옥 갔으면 합니다. 그날은 바람이 더도 덜도 말고 3일만 불어라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 후 나는 여수에 들렀고 백도가 아닌, 잘 아는 목사의 교회당으로 인도하여 세례를 받도록 주선했었다.
요즘 나는 나를 정리하고 있다. 정호승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아름답게 남았으면 한다. 이제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박목월 시인이 당부했던 것처럼 추억을 아름답게 고즈넉이 담아 ‘이야기 시’를 쓰고 싶다. 특히 롱 셀러 ‘내 사랑 너를 위하여’에 ‘스토리텔링의 기법’을 구사하여 요한복음 15장의 비의를 곁들여 주님에 의해 사랑에 눈 뜨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감정과 사상, 필요성과 꿈의 세계가 새로워지는 얘기를 담고 싶다. 이젠 좌절 않고 꿈을 펴야겠다. 그동안의 역경을 창작의 힘으로 승화시켰으면 한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