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주연] 방어를 알면 겨울이 즐거워

입력 2012-11-04 19:43


갑자기 쌀쌀해진 날에 해산물로 유명한 한 식당에 갔다. 메뉴판에서 눈에 띈 것은 도루묵 조림. 작년 김장 때 먹은 도루묵이 생각났다. 가족 모두 모여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씻고 속을 채우느라 허리가 휠 것 같았다. 그때 입 안 가득 씹을 때마다 탱글탱글한 알이 톡톡 터지고, 살은 탱탱하고 기름져서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연인을 보내듯 아쉬웠다. 노동의 피로가 날아갔다.

김장 후 한두 달 정도 지나 다시 도루묵을 먹었는데 그때는 이미 살이 쪽 빠져 빈약한 모습이었다. 왜 선조가 ‘도로 묵이라 하여라’라고 했는지 백 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피난 내려가다가 도루묵을 맛보고 감탄해 ‘은어’라고 부르라고 명령했던 것이 11월 즈음이요, 궁궐로 돌아와 도루묵을 다시 맛 본 것은 봄 정도가 아니었을까. 도로 묵이라고 한 것은 은어가 제 철이 지났기 때문이지 흔히 이야기하듯 궁전의 진수성찬에 비교할 수 없는 서민의 생선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친구들은 찬 바람 불기 시작할 때 먹어야 제 맛이라며 도루묵 조림을 맛 있게 먹었다. 이때 먹어야 할 것이 또 있다. 방어다. 얼마 전에 갔었던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가게 주인이 권한 것도 방어였다. 진한 분홍 빛 살이 입 속에 넣으면 살살 녹았다. 예전에 봄이 오기 전에 꼭 먹어야 할 것이 있다며 친구가 내 팔을 끌고 가서 처음 제대로 먹은 적이 있다. 추위에 진절머리를 내며 따뜻한 봄을 기다리던 나와 달리 그 친구는 겨울이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순전히 방어 때문이다. 지금은 그 친구 마음을 알고도 남는다.

우리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옷이 길어지고 두꺼워지고, 색깔이 진해지면 겨울, 밝고 얇아지면 봄이 오는 것으로. 그러나 식생활로만 본다면 점심은 김치찌개, 회식은 삼겹살, 친구 만나면 스파게티와 피자, 횟집에서는 광어 등 사시사철 같은 메뉴다. 재미없다. 이젠 옷처럼 계절별로 음식을 즐겨보면 어떨까. 좋은 사람과 그때만 즐길 수 있는 제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추억을 쌓아가고, 시간의 내왕을 즐기는 것이다.

호텔의 한 주방장은 찬바람이 불면 생선살이 올라 다 맛있다며 겨울에는 해산물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고 했으니 그쪽을 집중해 봐야겠다. 맛의 대가이신 한 분은 겨울엔 무가 최고라며 날로 먹어도 달다고 했다. 굴을 잔뜩 넣은 생채나 깍두기, 무나물도 해먹어 봐야겠다. 역시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안주연(웨스틴조선 호텔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