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맹경환] 재벌들도 경제민주화 방안 내놔야

입력 2012-11-04 19:43


이명박 정부 출범 뒤 경제 정책 기조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명분은 트리클 다운(trickle down·낙수효과).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시듯 정부가 투자확대나 세금감면을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富)를 먼저 늘려주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 혜택이 돌아간다고 하는 논리다.

정부는 재벌들을 위해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하고 법인세를 낮췄다. 수출 대기업을 위해서는 고환율 정책까지 보태줬다. 그러나 낙수효과는커녕 부는 재벌과 그 주변에만 넘쳐났고 하청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갈수록 빈곤해졌다. 재벌들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면서 골목 슈퍼와 동네 빵집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이명박 정부가 출자총액 규제를 풀어준 결과 35대 대기업집단의 계열사는 2007년 4월 812개에서 지난해 말 1282개로 4년8개월 만에 58%나 증가했다. 어림잡아도 1년에 한 곳당 3개 정도로 계열사를 늘린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35개 대기업집단 중 22곳이 지난해 말 현재 중소기업 관련 업종에 진출해 있다. 관련 계열사가 74곳에 달한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돈이 없어 쩔쩔매고 있지만 10대 재벌의 사내 유보금은 180조원이 넘고 이 중 현금성 자산만 52조원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곳간에 돈을 쌓아놓고 있지만 경제 불확실성을 이유로 투자에 나서지 않으면서 내수와 서민 경제는 피폐해지고 있다. 중소기업은 고질적인 부당 납품 단가 인하, 기술자료 요구, 인력 빼가기 등 구조적인 불공정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양극화가 우리 경제의 최대 문제점으로 부상하면서 정부는 2010년 9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추진대책’을 확정했다. 정부의 정책 기조가 ‘비즈니스 프렌들리’에서 ‘동반성장’으로 전환된 것이다.

정부가 동반성장을 부르짖은 지 2년이 넘었지만 동반성장이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인 양극화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정부의 의지는 의심스러웠고 재벌들은 그런 정부 눈치만 보면서 시늉만 했다. 일감몰아주기도 여전해 지난해 총수가 있는 상위 10대 재벌의 내부거래 매출액은 전년보다 28%나 늘어났다.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재벌 총수들에 대한 비난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재벌에 대한 곱지 않은 국민들의 시선은 어느덧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으로 만들었고 거스를 수 없는 큰 물결이 됐다. 민의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대선 주자들은 장충동 족발집 원조 논쟁하듯 경제민주화를 부르짖고 있다.

재벌들이 경제민주화의 대상이 돼서 정치권과 국민으로부터 저항을 받고 있는 것은 재벌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재벌들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를 앞세워 경제민주화 논의를 ‘반시장적’이니, ‘위헌’이니 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게다가 “대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일자리 창출을 어렵게 한다”거나 “최악의 투자위축이 이어질 경우 한국경제 위기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될 것”이라며 정치권과 국민을 협박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재벌의 힘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국민을 이길 수는 없다. 정치권의 기세도 쉽게 꺾일 것 같지 않다. 다른 방법이 없다. 재벌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이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경제민주화 방안을 직접 내놔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사랑 속에 재벌도 크고 국가 경제도 튼튼해질 수 있다. 가진 자가 더 내놓고 양보해야 하지 않겠나.

맹경환 경제부 차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