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청계천 ‘반짝이’ 상인 李씨
입력 2012-11-02 18:21
청계천 상인 이상근(58)씨는 의류 액세서리로 쓰이는 ‘반짝이’ 제조·유통회사 ‘나이스 인더스트리’의 사장입니다. 샤넬 등 명품 브랜드에 납품하는 회사입니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그는 중학교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기름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전형적인 베이비붐 세대죠. 지금의 청계광장∼청계7가 시장통이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발 안 닿은 곳이 없죠. 인쇄 건축 공구 원단 의류 전자 금형 등 모든 업종이 집약돼 “심하게 얘기하면 비행기도 만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1960∼80년대 얘기죠.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청계천 평화시장 봉재사 전태일이 그 모든 것을 말해주던 시절이었고요.
이분과 악수하면 나뭇등걸 잡은 듯 거칩니다. 왼손을 내밀죠. 서울 온 지 몇 해 안 돼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기계에 물려 잘렸기 때문입니다. 새벽녘 손가락이 잘렸는데도 상처 싸매고 하던 일 마치고서야 가까운 을지병원에 갔던 ‘독종’입니다. 70년대 세운상가 벌집에서 먹고 자며 금형을 배웠답니다. 말이 좋아 기술자이지 ‘시다’였지요. 그 무렵 우리 기술력은 일본 제품 카피하기에 바빴답니다. 다방 가면 심심풀이로 동전 넣고 하루 운수를 보는 재떨이의 금형을 만든다든지 하는 거죠.
이분은 장인정신이 넘칩니다. 의류관련 기계 등 제품 특허만 50종입니다. 그의 사무실에 일렬로 쭉 걸려있어요. 셋방 전전하면서도 공구 좋은 거 보면 무조건 사고 보는 사람입니다. IMF 환란 전 모피코트 사업을 하면서 모피 털을 원단에 심는 기술 개발에 과도하게 투자했다가 부도를 맞기도 했습니다. “짐승가죽 얻으려면 얼마나 많은 짐승을 죽이겠어요. 양모(羊毛) 얻듯 하고 싶었죠. 심으면 될 것 아닙니까.”
부도 직후 트럭을 개조해 떡볶이 장사를 했는데 여기서도 그의 손재주가 발휘돼 ‘노점 기업’이라고 할 만큼 돈을 벌었습니다. 떡볶이 불판 등을 개량해 맛으로 승부를 건 것이 주효했어요.
그의 청계천 DNA는 지금도 계속돼 50여명 직원에 연매출 50억원 이상 올리는데도 편한 삶 버리고 기계 개발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절삭기에 허벅지 일부가 잘리는 사고가 발생했죠. ‘반짝이’(핫피싱) 사업은 2000년 초반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 역정을 들으면 근대화 시기 청계천 라인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실리콘밸리 주역들의 열정이 묻어나는 듯합니다.
그는 요즘 착잡하다고 합니다. 경기가 너무 죽었고 이를 살리려는 정부의 의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말고는 뭐가 보입니까? 또 그들의 하청회사가 살아남던가요? 제조사들은 다 해외에 있어요. 우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365일 벼룩시장 등에 광고를 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해고해 달라고 말해요. 실업급여 타겠다는 거죠. 실업급여는 나이든 사람에게 주고 청년들에게는 취직하면 월급에 얹어주는 정책이 필요해요.”
그는 1일 경기도 광주 공장 인근에 원룸 7채를 계약했습니다. 직원들 복지를 위해서죠. 또 떡볶이 노하우를 살려 사회적 기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서울 디자인실 직원에겐 몇 개월 전 “난 여기 수익 한 푼도 안 가져간다. 너희 수익이다. 다만 너희가 브랜드 가치만 올려주면 된다”고 했답니다. 그가 정말 염려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열정이 없는 청년’ 문제였습니다. 곧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한 창의성을 개인이나 정부가 에너지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는 거죠. ‘폼나는’ ID카드 목에 안 걸면 차라리 알바하고 마는 세대라는 거죠. “이런 식이면 15년 안에 중국에 다시 조공 바친다”는 말이 과하게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전정희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