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저작권 불감증 ‘비상’] 악보 불법 복사?… 스위치 끄세요
입력 2012-11-02 20:59
지난달 31일 서울 관악구의 한 교회에서 성가대가 복사된 악보집을 펴놓고 찬양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한 성도는 “악보집 하나를 구입한 뒤 여러 권 복사해서 쓰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이 있는 악보를 사전 허락 없이 복사해서 쓰는 게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다른 교회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국교회가 저작권법의 처벌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법규 위반의 고의성이 없는데다 수익을 노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법의 잣대를 엄격히 적용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계속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송사에 휘말릴 수 있다. 한미, 한·유럽연합(EU) FTA가 발효되면서 외국 저작권 단체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기독음악 저작권 관리업체인 미국 ‘기독교 저작권 라이선싱 인터내셔널(CCLI:Christian Copyright Licensing International)’을 비롯한 저작권관리업체들도 모니터링에 적극 나설 가능성이 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현재 한국교회의 저작권에 대한 인식 수준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2007년 한국교회 36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교회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구입과 관련해 “컴퓨터 용도와 대수에 맞게 정식 예산 항목으로 책정돼 있다”고 응답한 교회는 7곳(19.4%)에 그쳤다. ‘정식 예산 없이 소모품·비품으로 지출’ 18곳, ‘별도 예산 없이 부서담당자 차원에서 해결’ 9곳, ‘지출한 적 없다’ 2곳으로 나타났다.
기윤실 자료 이외에 저작권과 관련한 한국 교회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는 최근 통계나 자료는 찾기 어렵다. 기윤실 관계자는 “제대로 된 데이터가 없다는 것 자체가 우리 교회의 저작권 인식 수준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기윤실의 설문조사에 참여한 36개 교회 중 평균 출석교인 수가 100명 이하인 곳은 5곳에 불과했다. 1000명 이상인 교회 10곳을 비롯해 중·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설문이 이뤄진 만큼 70% 이상을 차지하는 국내 미자립교회의 저작권 인식 수준은 더욱 미미할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재정난에 허덕이는 교회에선 성가대에서 쓸 악보집을 사놓기도 부담스런 실정이다. 경기도 평택시의 한 개척교회 담임목사는 “악보집을 한 권 사놓기는 했지만 자주 부르는 찬양을 따로 복사해서 묶어놓은 복음성가집을 주로 활용한다”면서 “교회 예산이 넉넉지 않은 데다 악보를 사다놓으면 분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상당수 교회들이 대기업에서 제조된 컴퓨터 대신 비교적 저렴한 조립식 컴퓨터를 구매하다보니 하드디스크에 깔려 있던 불법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교회관리, 성경검색, 악보편집 등의 프로그램을 불법 다운로드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범교단 차원 대책과 입법 운동 추진 시급
전문가들은 저작권을 존중하는 교계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을햇살 법률사무소 고영일 변호사는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컴퓨터 프로그램과 악보를 불법 복사해서 쓰는 것”이라며 “일부 교회에서는 악보집을 무단 복제해 편집한 가스펠악보집을 판매도 하는데 이 같은 행위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 저작권법은 보도·비평·교육·연구 등을 위해 예외적으로 저작물을 일정 부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종교적 목적에 해당되는 면책 조항은 없다. CCLI가 최근 한국지사를 설립하는 등 외국 저작권업체의 국내 진출이 현실화됐다는 점도 주의깊게 봐야 될 대목이다.
저작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간 사용료를 저작권관리업체에 일괄 지불하고 이 업체에서 관리되는 저작물을 이용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자칫 저작권관리업체들의 배만 불려줄 수 있다는 우려가 큰 만큼 이 경우 교계가 협의체를 구성해 저작권단체와의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기윤실 정직운동윤리본부장 신동식 목사는 “범교단 차원에서 대응하기 어렵다면 각 교단별 대표가 저작권 단체들과 협상에 나서야 합리적인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종교 목적으로 저작물을 사용할 경우에 한해 저작권 침해 책임을 일부 면책할 수 있도록 입법 운동을 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연세대 법학대학원 남형두 교수는 자신의 연구논문 ‘종교단체와 저작권’에서 미국 저작권법을 예로 들었다. 미국 저작권법 제110조 3항에서는 “예배 장소나 기타 종교적 집회에서 거행되는 의식 과정 중 비연극적 어문저작물이나 음악저작물 또는 종교적 성격을 지닌 악극저작물을 실연하거나 저작물을 전시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남 교수는 “교회라고 해서 세상법으로부터 치외법권 지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고 전제한 뒤 “교회의 종교 목적 사용에 대해 일정 부분 면책을 허용하고 있는 미국 저작권법과 같이 우리 저작권법도 개정 요인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