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로의 부드러운 전이… 오르한 파묵 강연집 ‘소설과 소설가’
입력 2012-11-01 18:09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프랑스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1808∼1855)이 말한 꿈처럼 소설도 우리네 삶의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보여주고,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사람, 얼굴, 물건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터키 출신 오르한 파묵(60)이 2008년 가을, 미국 하버드대학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 초청돼 행한 첫 강연의 서두이다. 그는 왜 소설이 두 번째 삶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여섯 차례에 걸친 파묵의 강연을 묶은 ‘소설과 소설가’(민음사)에 답이 있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나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12쪽)
픽션(허구)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 진짜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율배반의 작용에 의해 비로소 소설은 존재성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또 다른 비밀은 등장인물과의 동일화에 있다.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 풍경이 등장인물의 정신상태의 연장선이거나 일부라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우리는 부드러운 전이로 이 등장인물들과 동일화됩니다.”(19쪽)
파묵이 지적한 소설의 또 하나의 비밀은 우리가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 이성과 지각은 낯선 환경에 놓인 겁먹고 당황한 동물처럼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실은 우리가 이를 수행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운전하면서 버튼을 누르고 페달을 밟고 기어를 변환하고 수많은 규칙에 따라 운전대를 좌우로 돌리고 도로 표지판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며 교통 신호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운전자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묵은 정작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자신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점차 모든 인간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음을 강조한 최초의 위대한 작가는 물론 미셸 몽테뉴입니다. 그가 계발한 기법 덕분에 우리 소설가들의 첫 번째 임무가 주인공들과 동일화하는 것임을 이제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살아났으니 이제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것. 그게 두 번째 삶인 소설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