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태양빛에 상처를 드러내다… 한강 세 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입력 2012-11-01 18:09
12년 만에 세 번째 소설집 ‘노랑무늬영원’(문학과지성사)을 낸 소설가 한강(42)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단편은 성냥 불꽃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당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7편의 수록작은 그가 당긴 일곱 개 성냥의 불꽃일 것이다. 성냥을 켜본 사람은 안다. 손가락이 타들어가는 아픔 없이 어찌 불을 켰다고 할 것인가. 한 편 한 편이 뜨거운 여운을 남긴다. 발표 순서로 보면 표제작은 수록작 가운데 가장 먼 2003년 발표했고 최근작 ‘밝아지기 전에’는 올여름에 발표했다. 그 사이에 10년 세월이 가로놓여 있지만 작가는 일관되게 영혼 회복의 문제를 들추고 있다.
표제작의 주인공 ‘나’는 운전 도중 도로에 뛰어든 개를 피하려다 교통사고를 낸다. 후유증으로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된 ‘나’는 화가라는 직업도 남편의 사랑도 잃을 처지에 놓인다. “그때 나는 그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내 몸이 그 전복된 차량 속에서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튀어나와 버렸다는 것을. 아니, 거꾸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로부터 튀어나와 버렸다는 것을.”(235쪽)
상처는 몸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만이 아니다. 데면데면하게 ‘나’를 대하는 남편과의 괴리감, 뭔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영혼에 가해진 상처인 것이다. 절망에 빠진 ‘나’는 우연히 친구 집에서 애들이 기르는 도마뱀을 본다. 사고로 잘려나간 도마뱀의 앞발에 비록 작지만 새 발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 노랑무늬영원.”(286쪽)
‘나’는 불도마뱀의 학명인 ‘노랑무늬영원’을 중얼거려본다. 그 발음이 가냘프게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언젠가 노랑색으로 작업을 하던 노화가의 말을 떠올린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305쪽)
주인공은 상처나 고통을 어둠 속에 감춘 채 억지로 초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낮의 현기증을 동반하는 노랑 태양빛에 상처를 비춤으로써 상처를 빛의 지문으로 어루만진다. 숨지 않고 상처와 맞서는 이 같은 태도는 한 직장에 근무하다가 여행가로 변신한 은희 언니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혼한 ‘나’가 등장하는 최근작 ‘밝아지기 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작가인 ‘나’는 마지막 항암치료를 끝낸 터라 하루라도 빨리 은희 언니가 보고 싶다. 언젠가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온 은희 언니는 이렇게 들려주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이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109쪽)
하지만 은희 언니는 뎅기열로 인해 싸늘한 시체가 돼 돌아온다. 화장장으로 달려간 ‘나’는 은희 언니를 떠올리며 썼던 파일의 첫 문장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를 지우고 이렇게 쓴다. “그녀가 회복되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회복해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