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과거로 유랑하는 개인, 역사의 상처를 보듬다… ‘모든 복은 소년에게’

입력 2012-11-01 18:07


모든 복은 소년에게/정철훈/문학동네

역사 속에서 상처 입은 개인의 존엄성과 이념이 빚어내는 갈등에 천착해온 정철훈 작가가 또 한번의 변주를 만들어냈다. 이번엔 재소(在蘇) 한인 강제이주에 얽힌 이야기다. 사료 속에서 건져낸 건조한 소재가 아니라, 국민일보 문학전문기자이기도 한 작가가 실제 1990년대 중반 러시아에 유학하며 외무성 외교 아카데미 역사학 박사과정을 마친 개인적 경험이 녹아 있기에 구체적인 묘사에선 물질감이 진하게 묻어난다.

작품의 주인공은 1937년 스탈린 시대 재소 한인의 강제이주에 대한 논문을 썼다. 논문은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통과해 타이핑만 남겨둔 상황.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아들을 찾기 위해 이주비용 500루블을 달라고 요청하는 한 아버지의 청원서를 기밀 해제된 정부 문서에서 찾아낸다. 이후 이주 과정에서 사라진 소년의 이미지는 주인공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급기야 주인공은 소년의 이주 경로를 따라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 여정에서 몸에 자력이 생겨 모든 쇠붙이가 달라붙게 된 알마티의 재소 한인 빅토르, 우연한 만남에 의해 짧지만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 타슈켄트의 타냐, 또 이브람체보에 사는 타냐의 할아버지를 만난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살던 곳에서 내쫓긴 이주민이자 그들의 후손이다.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주인공이 가졌던 소년에 대한 강박증은 서서히 사라진다.

“나(주인공)는 모스크바의 낯선 곳에서나마 멀쩡히 숨을 쉬고 있고, 세월의 저편에서는 김씨의 세 살 난 올가가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화물칸의 차디찬 마루 짝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랄해 구역으로 갔다는 아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팔순에 이르렀을 것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엔 이렇듯 멜랑콜리가 흐른다. 그건 이것이 단순히 강제이주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한 철학적 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다른 시간대로 번져들고 있었다. 미래로는 갈 수 없되 과거로는 얼마든지 번져들 수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을 주었던 게 분명하다. (중략) 나 자신이면서 타인, 타인이면서 나 자신인 소년은 전존재가 되어 과거 속에 살고 있다.”

그 번져듦은 역사를 벗어던지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역사와 뒹굴고 그것이 준 상처까지 껴안으려 하는 작가의 삶의 태도와 연관된 것이기에 ‘비극의 힘’으로 살아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