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차정식] 젊은 죽음이 외치는 소리

입력 2012-11-01 18:35


“10대녀 3명, 아파트 옥상에서 동반 투신.” 일간신문의 단신으로 처리된 이 기사제목이 시선을 당겼다. 10월 30일 오후 10시30분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책상 앞에서 태연히 글을 읽던 바로 그 시각이다. 부산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20세도 안된 청소년 3명이 몸을 던졌다. 부산 대구 광주로 거주지가 다른 이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나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의 벼랑 끝에서 막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숱하게 접하는 소식이라 이런 뉴스는 별스런 화제로 거론되지도 못하는 이즈음이다. 하루 평균 42명이 목숨을 끊는 세계 제일의 자살대국인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조차 자살이 사망이유 중 최고로 등극한 지 벌써 몇 년째다. 지난 10년간 청소년 자살률이 두 배나 증가했다니 거기에는 분명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곡절이 있을 게다. 무엇이 채 꽃피지도 못한 젊은 생명들을 이렇게 처참한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세우는가. 그들에게 절망의 뿌리를 키워준 사회적 요인은 무엇일까. 그 절망을 압도할 희망의 빛이 우리 사회에 이다지도 희미한 건 또 왜인가.

벼랑 끝에 선 이 땅의 청소년들

이 땅에 자살의 도미노 사태가 봇물 터지듯 번지며 생명이 무참하게 가벼워진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시작된 1997년이었다. 이후 구조조정 여파로 직장을 잃거나 파산한 수많은 사람들이 극단의 지경으로 내몰려 스스로 세상을 하직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발발하여 유럽으로 옮겨간 뒤 여전히 흉흉한 소문을 몰고 오는 금융위기 사태도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을 달달 볶아대고 있다. 벼랑 끝까지 버텨보다가 그 끝자락에서 고달픈 삶을 망각할 죽음의 세계로 직진하는 행렬이 지금껏 이어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망가진 생명회로는 많은 가정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 청소년들마저 흉가를 뛰쳐나와 방황하다가 가장 극단의 방식으로 생의 종지부를 찍고 있다.

자살의 내력과 배경이야 이론적으로 볼 때 그리 단순하지 않다. 명분이 있는 경우 ‘고귀한 죽음’으로 자리매김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에는 이런 성향과 무관하게 ‘생계형 자살’이 주조를 이룬다는 데 있다. 생계의 고단함에 눌려 자포자기 심사로 튕겨져 나간 청소년의 자살은 그래서 더더욱 애꿎은 피해 유형이다. 어른들의 생계문제가 자녀들을 사지로 몰아 벼랑 끝에 서게 한다는 것이다. 무한경쟁으로 몰아가는 제도권 교육체계의 파행과 청소년 문화의 황폐함도 젊은 학생들의 숨구멍을 조이는 벼랑 끝 사태의 또 다른 요인이 된다.

이처럼 젊은 죽음을 양산하는 가정과 학교,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는 몇 사람의 영웅호걸이 나선다고 단숨에 해소될 사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젊은이들 개인과 그 주변 공동체의 관심 차원에서 절망을 압도할 희망의 에너지를 북돋아주는 것이 다급한 최선의 길이다.

자비와 긍휼로 절망 이겨내야

예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어떻게 벼랑 끝에서 희망이 싹트는지를 깨우쳐주셨다. 포도원에 심어놓은 무화과나무는 외톨이처럼 보였다. 무슨 까닭이었는지 이 나무는 3년간 열매를 맺지 못해 땅만 버린 셈이 되었다.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했지만 포도원지기는 1년의 유예시간을 구하며 그동안 거름을 주고 잘 가꿔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벼랑 끝에서 외로운 무화과나무를 구해낸 것은 생명을 향한 포도원지기의 순정한 자비와 긍휼이었다.

오늘도 절망의 수렁에서 극약을 먹거나 높은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젊은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몸부림치며 외치고 있다. 살고 싶다고, 가능하면 잘 살고 싶다고. 자비와 긍휼로 죽음의 수렁에서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