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37) 세계의 수상함에 대한 철학적 모놀로그… 시인 정한아
입력 2012-11-01 18:10
협잡에 과격할 수밖에 없는 세계화 시대의 시적 탐구
1987년 6월 어느 날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치자 화분에 깔린 이끼 위를 기어 다니던 민달팽이를 한 시간쯤 들여다보았다. “집이 없구나, 너도. 이렇게 혼자인데 말이지.” 오후 네 시의 햇빛은 느리게 유동하는 어떤 집중된 정서가 돼 그를 일종의 명상 상태로 몰아넣었다.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들을 연습장에 적기 시작했다. 마주한 것은 텅 빈 하얀 종이였다. 이때가 열두 살. 정한아(37)는 조숙한 소녀였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껌 종이에 인쇄된 시들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것을 베꼈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가 쓴 이별에 관한 시도 있었다. 말랑말랑했던 1980년대의 유년은 등화관제처럼 사방의 불빛이 꺼지는 반공의 국가주의와 대립한다. 민방위 훈련 중에는 책상 밑에서, 애국조례 시간엔 앞에 선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서, 실컷 ‘멍 때린 채’ 명상에 몰두하던 소녀가 정한아였다. 그때 생각했다. “난 커서 뭐가 되지? 아무래도 책상 앞에 앉아, 쓰거나 읽는 걸 해야 할까 봐.” 생각은 현실이 됐다.
“한밤을 펜과 씨름하다/ 책상에 엎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책상의 이데아도 질료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 책상의 나직한 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 (중략)/ 내가 후려갈기고 긋고 할퀴고 물어뜯고 종국에/ 머리를 박아대던 책상,/ 책상은 제 다리 밑에 숨겨줍니다/ 거기서 손가락 빨며 눈 빨개지도록 웁니다”(2006년 ‘현대시’ 등단작 ‘애인’)
책상은 그의 애인이었다. 책상은 완료되지 않은 서사의 상징이자 의문이 풀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서울 무학여고에 진학한 그는 곧장 문예반에 들어갔다. ‘동랑예술제’ 포스터 붙은 걸 보고 응모했는데 당선작 없는 가작이 됐다. 상 받으러 다녀왔는데 ‘왜 맘대로 수업 빠지느냐’고 혼쭐이 났다.
고교 선배였던 김귀정(1966∼1991·당시 성균관대 불문과 3학년) 열사가 시위 도중 사망해 관에 실린 채 노제를 지내러 학교 교정에 왔다. 80년대의 폭압적 세계를 교정에서 지켜보면서 그는 시대착오적인 삶과 사회학적 균열을 떠올렸고 글 쓰는 것보다 생각을 잘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해 문학보다 철학을 택했다. 성균관대 철학과에 진학해서도 주로 ‘사회철학’에 관한 저작들을 읽었다. 그를 두고 학교 선배들은 94학번이 아니라 마치 86학번 같다고 말하곤 했다. 80년대는 그가 직접 겪은 체험이 아니면서도 추경험(간접 경험)을 통해 상호 교감함으로써 자아를 보다 확충시켜 주는 교량적 역할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외환위기가 밀어닥쳤고 곧이어 자유무역협정(FTA) 사태가 이어졌다. 2011년 가을, 그는 불현듯 ‘아름다움은 협잡에 대해서는 늘 볼셰비키다’라는 문장을 써놓고 밤마다 그 뜻을 부풀렸다 취소했다 갱신하며 생각을 공굴렸다.
“대량 재배된 슈퍼옥수수와 대량 도축된 돼지고기에/ 공정무역 커피로 입가심을 하면 우리는/ 조금 괜찮은 대량 슈퍼사람 같지/ 않나 기부라도 한 것 같지/ 않나 내가 진짜 식당 얘길 하는 것/ 같나// (중략)// 진짜 식단이 필요해 모든/ 별들은 폭발하며 태어난다 그걸/ 내파라고 불러야 하나 외파라고 불러야 하나 최초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움은 협잡에 대해서는 늘 볼셰비키다”(‘프랜차이즈의 예외적 효과에 관하여’ 부분)
‘볼셰비키’는 ‘과격’ 내지 ‘과격파’를, ‘협잡’이란 프랜차이즈식 식당처럼 적립금을 내건 채 지구촌 사람들의 허기와 식욕을 담보로 확장되고 있는 세계화 시대의 모순을 각각 지칭한다. 철학을 전공한 정한아의 시적 탐구는 이렇듯 협잡에 대해 과격해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이 시에 대한 시작 노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성자도, 영웅도, 천재도 아닌 우리의 가장 위대한 특질은 우리가 조금씩 썩어 있다는 것이며, 이 썩은 구멍들로 네트워크를 엮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 썩은 부위들을 후벼 파지 않고 견딜 수 있는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