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농사꾼, 자활의 꿈 영근다… 서울영농학교 졸업생 20명 첫 배출
입력 2012-10-31 19:27
31일 오전 11시 경기도 양평의 서울시립 양평쉼터. 파란색 바람막이 재킷을 맞춰 입은 스무 명의 중년 남성들이 벅찬 표정으로 연단에 섰다. 이들은 시립 서울영농학교의 첫 졸업생들. 이 학교는 노숙인 자활교육을 목적으로 서울시가 지난 4월 설립했다.
감격의 졸업장을 받은 최진수(가명·55)씨는 1997년 외환위기 전엔 건설 관련 업체를 운영하는 번듯한 사장님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듬해 회사가 도산했고, 집과 재산이 경매로 넘어갔다. 당장 누울 자리조차 없어 처가 생활을 시작했다. 일자리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소주를 끼고 생활정보지만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가족들은 최씨를 외면했다.
견디다 못한 최씨는 아내와 이혼하고 2007년 가을 거리 노숙을 시작했다. 서울역과 영등포, 종로 일대를 떠돌며 술에 절어 살았다. 그러던 중 올해 초 우연히 동료 노숙인에게 영농학교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최씨는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져 있던 차에 영농학교가 나를 구제해 줄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영농학교에선 농업기술 전문 강사진이 채소, 버섯, 화훼, 특용작물 등 각종 영농기술을 가르쳐 준다. 노숙인의 소양을 높이기 위한 인문학 강좌와 자격증 취득, 신용회복 등도 지원한다. 교육 과정을 이수한 노숙인에겐 임대 농지와 농가 등 자립 기반을 제공한다.
최씨는 이제 어엿한 농사꾼으로 제2의 삶을 꿈꾸고 있다. 시의 도움으로 강원도 홍천에 대지 2247㎡(약 680평)와 집을 마련했다. 올 연말부터 아로니아, 생강, 콩, 마늘을 재배할 계획이다. 이혼한 아내와도 연락이 닿아 최근엔 매달 3번씩 만나고 있다. 그는 “아로니아 농사가 잘되면 땅을 지금의 4배로 늘려 농장을 본격적으로 키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영농학교 2기생은 내년에 모집한다. 시는 이들이 졸업과 동시에 귀농 또는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을 펼칠 계획이다.
김경호 시 복지건강실장은 “한때 노숙생활을 했지만 서울영농학교를 졸업하고 새 삶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볼 때 가슴이 뿌듯하다”며 “한 번 실패한 시민들이 영원히 좌절하지 않고 다시 희망을 품고 일어설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