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香의 고을 고택 처마엔 가을 끝자락이 걸렸네… ‘경북 영양 두들마을’

입력 2012-10-31 18:16


문학의 향기 그윽한 ‘언덕 위의 마을’에 만추가 깊어간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고택 굴뚝에서는 안주인이 살아 있을 때처럼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가난한 이웃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상수리나무는 이제 고목으로 성장해 마을을 지그시 굽어보고 있다. 젊은 날의 좌절을 극복하고 이제는 돌아와 고향과 화해한 백발성성한 작가가 두들마을 산책길에서 소설 ‘선택’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줍는다.

문인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 경북 영양군 석보면의 두들마을은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작가 이문열의 고향이다. ‘두들’은 둔덕의 순 우리말로, 두들마을은 ‘언덕 위의 마을’이란 뜻. 단풍이 울긋불긋한 두들산을 등지고 앞에는 화매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두들마을은 원리교 너머 사과밭에서 볼 때 언덕 형상이 더욱 뚜렷해진다.

두들마을은 재령 이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광제원(廣濟院)이 있던 마을이다. 석계 이시명(1590∼1674)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하자 1640년(인조 18년)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입향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이현일과 이재, 의병대장 이현규, 1919년 ‘파리장서사건’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이돈호·이명호·이상호, 항일시인 이병각·이병철 등이 모두 이 마을 출신들이다.

걸출한 인물은 많이 배출됐지만 마을은 크지 않아 한두 시간이면 꼼꼼하게 둘러볼 수 있다. 색색의 단풍과 고택이 어우러진 가을날의 두들마을은 한 폭의 풍경화. 석계의 부인이자 ‘음식디미방’이라는 조리서를 저술한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가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가 유생과 아이들을 가르치던 석천서당을 비롯해 주곡고택, 유우당, 남약정, 광록정, 만석꾼의 집 등이 고색창연한 멋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한옥으로 지어진 음식디미방 체험관, 음식디미방 교육관, 음식디미방 전시관, 정부인 안동 장씨 예절관 및 유물전시관, 이문열 작가의 집필공간인 광산문학연구소와 북카페 ‘두들 책사랑’이 고택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 새집과 옛집이 서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두들마을을 대표하는 주인공은 정부인 안동 장씨. 이문열 소설 ‘선택’의 주인공인 정부인 안동 장씨는 작가의 13대조 할머니로 만년에 셋째 아들 이현일이 이조판서를 지내 조정으로부터 정부인의 품계를 받았다. 최근 이름이 장계향으로 밝혀진 정부인 안동 장씨는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나기 하루 전에 태어나 83세를 일기로 두들마을의 석계고택에서 타계할 때까지 시(詩), 서(書), 화(畵), 성리학은 물론 음식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자녀 7남3녀 중 아들 모두를 훌륭한 학자로 키워 조선시대 여인 중 유일하게 여중군자(女中君子)로 불리는 영예를 누렸다.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 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라. 딸자식들은 이 책을 베껴 가되 가져갈 생각은 말며 부디 상치 않게 간수하여 쉬 떨어버리지(떨어지게 만들지) 말라.’

정부인 안동 장씨는 일흔 살이 넘은 1670년경에 후손들을 위해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저술한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을 모은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자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로 예로부터 반가에서 전해오거나 스스로 개발한 음식 146종을 조리하는 방법을 담고 있다.

서책으로 전해오던 음식들은 2005년 음식디미방 보존회가 만들어지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들마을 입구에 위치한 음식디미방 체험관은 재현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공간. 재령 이씨 종부 조귀분(64)씨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내놓는 잡채, 어만두, 대구껍질누르미는 조미료 등 양념을 사용하지 않아 화려한 색감은 없지만 재료가 가진 맛이 그대로 입안으로 스며든다.

단풍이 절정인 두들마을에는 유난히 상수리나무 고목이 많다. 두들마을 언덕에 뿌리를 내린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는 석계 부부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심었다. 수령 370년이 넘는 상수리나무는 모두 50여 그루. 부부가 상수리나무를 심은 까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궁핍해진 이웃들에게 도토리죽을 끓여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정부인 안동 장씨 유적비 앞쪽 언덕의 바위에는 ‘낙기대(樂飢臺)’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배고픔을 즐기는 곳’이라는 뜻의 낙기대는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을 위해 구휼식량을 배급하던 곳. 정부인 안동 장씨 시절부터 시작된 재령 이씨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광복 직전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어디에서 출발하든 마을길들은 자연스럽게 마을 중앙에 위치한 광산문학연구소로 향한다. 그리고 때가 맞으면 집필을 위해 혹은 독자와의 만남을 위해 고향에서 며칠씩 머무는 이문열 작가를 만날 수도 있다. 우연하게도 청명한 가을날을 맞아 뜰에서 산책을 즐기던 작가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젊었을 때는 고향이 불평의 대상이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고향이 그리움의 대상으로 변했다”는 작가는 이제는 문학의 향기 그윽한 고향이 작가적 관점에서 자산으로 기능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시문에 뛰어났던 정부인 안동 장씨가 아녀자로서 자식 양육과 집안일에 충실했던 것은 ‘강요’가 아닌 ‘선택’이었다고 새삼 강조한다. 그의 소설 ‘선택’에서처럼….

영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