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과 얼굴은 펴져야 삽니다”… 만담가 장소팔씨 아들 장광팔씨 부전자전 인생유전

입력 2012-10-31 17:27


만담가 장소팔(1922∼2002).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시대의 문화아이콘이다. 그는 여류 만담가 고춘자(1922∼1995)와 함께 콤비를 이뤄 서민의 유일한 오락 매체였던 라디오의 최고 스타였다. 1980년 컬러TV 방송이 실시되기 전까지만 해도 만담은 가난한 시대에 울적함을 달래주는 빼어난 장르였다.

29일 오후 서울 신당동 성동공고 뒤편 ‘국민만담가 장소팔 선생 기념비’ 앞에서 그의 아들 장광팔(본명 장광혁·60·정해복지재단 상임이사)씨를 만났다. 신당동 청계천변은 장씨 일가가 40여년을 산 곳이기도 하다. 광팔씨는 타고난 끼로 만담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만담가이기도 하다. 아버지에 이어 ‘만담보존회’도 이끌고 있다.

158㎝의 자그마한 키, 항상 웃는 얼굴, 트레이드마크인 둥근 테 안경. 키를 묻자 “나이 들면 줄어요. 예전엔 160㎝였는데…”하며 웃었다. 그는 자신의 큰딸이 카타르항공 승무원, 작은딸이 연세대 로스쿨을 다닌다고 자랑했다. “승무원은 키가 162㎝는 돼야 채용 응시 자격이 있는 걸로 아는데…”라고 짓궂은 농담을 하자 “아, 우리 딸 167㎝입니다. 딸이 허리 숙여 절 안아줘요”라고 한다. ‘큐티한 60대’다.

그는 최근 가수 이수나(33)와 ‘칭찬하며 살아요’라는 음반을 냈다. 총 10곡이 담긴 이 음반에는 ‘빈대떡 신사’ ‘서울구경’ ‘잘했군 잘했어’ 등 아버지 세대가 부른 히트곡도 담겼다. 작곡가 김학민이 주로 편곡했다.

“‘칭찬하며 살아요’는 캠페인송과 같은 노래입니다. 갈수록 정이 부족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잖아요. 음반이 안 팔리면 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면 제가 손해 봐도 될 나이가 됐어요. 같이 부른 수나씨는 부모, 형제 포함해 4명이 정신지체장애인인데도 행복하게 살아요. 왜냐고요? 수나씨 주변 사람이 다 칭찬을 아끼지 않거든요. 가수가 노래 잘한다고 하는데 누가 신이 나지 않겠어요.”

그는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살았다. 60년대 국내 유일한 ‘동대문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며 자랐다. 장소팔은 전성기 때 돈을 자루에 담아 기사 둔 자가용을 이용해 영등포 한일은행(우리은행 전신) 지점에 맡기곤 했다.

“영등포까지 가는 아버지가 이해 안가 ‘왜 그 멀리 가세요’ 물으니 손 탄데요. 가까운데 돈 있으면 곶감 빼먹듯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돈 모으신 것도 아니었어요. 사랑방엔 금사향 박동진 이은관 묵계월 이은주 서영춘 곽규석 구봉서 어른 등 당대 국악인과 희극인들로 항상 왁자지껄했어요. 손이 크셨지요. 한량이셨지만 항상 베풀기를 좋아하셨고요.”

그는 초·중·고 시절 아버지 전령 역할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먹지 대본을 쓰면 그 한 장을 들고 서울 창신동 고춘자씨 집까지 뛰었다. 그는 “아버지의 한량 생활은 고춘자 선생이 막아줬다”고 했다. 어머니 귀에 바로 다음날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대문 안의 큰 극장이었던 스카라극장 옆 인쇄집에 현수막 주문하는 것이 제일 큰 심부름이었다”고도 회상했다.

광팔씨는 아버지의 통 큰 기질을 물려받았다. 단국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전공을 살려 법률출판사를 세웠고 이어 중형 서점인 일산문고(경기도 고양), 푸른문고(서울 길음동) 등도 운영했다.

“아버지가 모아 놓은 돈, 제가 사업하면서 많이 날렸어요. 서점해보니 척박하더라고요. 우리 인문환경에서 말이죠. 아버지 돈 쓴 게 죄송해 말년에 제가 대본을 직접 써드리곤 했어요. 나이 드시니 대본쓰기 쉽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부친의 삶을 이해하게 됐고, 명맥을 이어야 되겠다 싶었죠.”

그는 오래전 관여했던 복지재단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겐 늘 유머가 넘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을 위해 만담을 하는 것은 아버지가 그들에게 했던 ‘위로’를 되살리는 일이 됐다. ‘낙하산과 얼굴은 펴져야 삽니다’가 그의 슬로건.

“나를 낮춰야 남을 웃길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남을 칭찬하는 일도 나를 낮추는 것이고요.”

기념비 앞의 아버지 동상을 껴안고 밝게 포즈를 취해 주던 그는 시간이 되자 서두르기 시작했다.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환우들을 위한 사랑나눔’ 100회 공연이 있기 때문이다. 가수 김도향 김범용 주병선 등이 출연하는 이 행사는 그가 주도하고 있다.

“제 봉사가 필요한 곳이라면 만담보존회 회원인 개그우먼 안춘자, 가수 승주 등과 콤비를 이뤄 어디든 달려갑니다. 만담을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지금 개그 프로그램은 웃기긴 한데 격이 떨어져요.”

Key Word-만담

요즘 말로 개그다. 1920년대 연극 무대가 비극 주류이다 보니 이에 대칭하는 희극인이 필요했고 ‘코미디’라는 용어는 이때 쓰였다. 일제가 외래어를 못 쓰게 하는 바람에 만담이라 칭하게 됐다. 만담은 전승 소재를 바탕으로 한 지혜와 풍자가 담겼다. 만담가는 주로 원맨쇼에 가까운 재치를 뽐냈다. 신불출 양석천 양훈 서영춘 백금녀 장소팔 고춘자 김영운 등이 대표적 만담가로 꼽힌다. 장소팔은 구한말 고종 가무별감인 재담가 박춘재를 사사했다. 동갑내기인 여류만담가 고춘자와 콤비를 이뤘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