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규태 (9) 미얀마 들러 호주 온다던 각료들 아웅산 참사로…

입력 2012-10-31 21:04


대선을 앞두고 ‘중구난방’이다. 너나없이 모두가 애국자다. 하지만 뚜렷한 역사관이나 가치관이 없다. 모호하고 혼미하다. 호주의 한 친구가 ‘법을 모르고는 살 수 있지만, 눈치 모르고는 살기 힘든 사회’라고 빈정거리는 것을 들으면서 적이 부끄러웠다. 호주인들은 대체로 눈치 잘 보는 자를 회색분자라며 싫어하고 신의와 동류의식을 큰 덕목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 목숨 부지하고 살아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우여곡절도 많았다. 어떤 시절에는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다 가치 없었던 때도 있었고, 바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월도 겪었지만 나의 제안이 나라의 많은 대들보를 죽게 한 일은 평생 씻지 못할 회한으로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관계자들이 눈치 보느라고 기리 기억하고 기려야 할 중대사를 쉬쉬 덮으려 드는 것도 분통이 터진다. 참사 현장에 기념비 하나 세워놓지 못했었다. 국가도 슬그머니 외면하고 국민들이 건망증에 빠지는 것도 참기 어려운 터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부총리 등 많은 주요 국무위원을 비롯해 16명의 대통령 수행원이 북한 특수기관에 의해 폭사당했던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 올해로 29주년을 맞았다. 이때 문화공보부 보도국 직원으로 수행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가 찍은 처참한 사진들이 얼마 전 처음 공개돼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하고 있다. 당시 정부가 “국민을 아프게 할 수 없다” “고인을 다시 한번 죽이는 일”이라고 결론 내리고 공개하지 못하게 했던 사진들을 역사의 뒤편에 묻어둘 수만은 없다고 여기고 신문에 공개한 것은 늦게나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동안 이를 되도록 외면하려든 정부의 처사가 못마땅하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가 문득 떠오른다. 마음보다 머리, 그것도 잔꾀가 앞선 유대인 사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렬한 비판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다. 남의 아픔을 스스로의 아픔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행동하는 것, 거기에는 이론도 이념도 율법도 필요없는 것이다. 다만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성경에선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외면하고 피해버렸던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느꼈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아픈 이의 상처에 올리브유를 발라준 것이다.

아웅산 참사가 일어나기 수개월 전 나는 호주 국립대에 부임했었다. 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함병춘 박사가 어느 날 예고 없이 불쑥 내 연구실을 찾아 왔다. 그는 눈치 볼 줄 모르는 소신 있는 학자였다. 요긴한 문제를 은밀히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와는 하버드대 시절부터 가까이 지냈었고 연세대에 같이 근무했던 직장동료다. 그는 5공화국 정부와 호주의 관계개선 문제를 의논하러 온 것이다.

그 무렵 두 나라는 경제 교류가 원만하지 못했다. 호주는 일본과의 경제적 유대가 돈독했고, 그에 반해 우리는 자동차는 물론 TV 등 전자제품조차 거의 수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함 실장에게 일본이 경제 교류에 앞서 문화적 유대를 선행했던 예를 들어 호주 국립대 안에 한국학센터를 짓고 호주의 한국학 육성과 문화 진흥을 위해 기금을 내놓겠다고 한국 정부 차원에서 제의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말했었다. 함 실장은 참 좋은 의견이라고 무릎을 치더니 귀국한 지 얼마 안돼 내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며 곧 미얀마를 경유해 대통령과 많은 각료가 캔버라에 가게 될 것이라고 알려왔다. 이것이 아웅산 대참사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그런 내가 지난 30년 동안 느끼고 참회하고 그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어 온 것일까 하고 반문해본다. 더욱 신실히 참회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되씹어본다. ‘내가 아무런 할 일 없이 무심코 보내고 있는 오늘은 바로 어제 이 세상을 하직한 어느 죽음이 하늘을 우러러 소원하던 내일’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