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숲길 마음까지 물들인 가을날의 수채화… 경북 영양의 단풍과 낙엽

입력 2012-10-31 17:23


단풍과 낙엽에도 품격이 있다. 공해에 찌든 도심의 단풍이 색색의 물감으로 덧칠한 유화라면 이곳의 단풍은 속까지 투명한 수채화이다. 거리를 굴러다니는 도심의 낙엽이 바싹 마른 영혼의 부스러기라면 아침이슬에 젖은 이곳의 낙엽은 갈색추억을 노래하는 엽서나 다름없다. 활활 타오르는 단풍잎과 숲 속을 수놓은 낙엽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시어처럼 품격 높은 이곳은 경북 북부지역에서도 오지로 손꼽히는 영양이다.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는 영양은 청정지역인데다 일교차가 커 단풍이 선명하고 화려하다. 그 중에서도 입암면 연당마을의 서석지 담장 밖에 뿌리를 내린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는 저녁 햇살에 물든 황금색 은행잎이 새색시의 얼굴처럼 화사하다. 찬비에 우수수 떨어진 노란 은행잎은 시집에 끼워야 어울리는 추억의 책갈피.

전남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서석지는 석문 정영방(1577∼1650) 선생이 조성한 정원. 연못 속에 수많은 돌이 있어 ‘상서로운 돌이 가득한 지당’이라는 의미로 서석지(瑞石池)로 이름 지었다. ‘경정(敬亭)’이라는 편액이 걸린 정자의 마루에서 보는 서석지와 은행나무는 한 폭의 그림.

‘승무’로 유명한 조지훈의 고향마을 입구에 위치한 주실마을숲은 하늘을 가린 울창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으로 단풍과 낙엽이 멋스럽다. 조지훈 시비 ‘빛을 찾아 가는 길’이 발목 깊이로 쌓인 낙엽 속에서 홀로 숲을 지키고 있다. 주실마을숲은 ‘200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명품 숲.

주실마을숲과 가까운 주실마을에는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을 비롯해 고택들이 단풍이 고운 마을 뒷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가을풍경을 그리고 있다. 한양 조씨 집성촌인 주실마을은 교육열이 특별해 수많은 박사와 교수를 길러낸 ‘박사마을’로도 유명하다. 주실마을의 지훈문학관에는 조지훈의 삶과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본다는 해발 1218m 높이의 일월산(日月山)은 경북에서 가장 높은 산. 영양의 젖줄 반변천을 거슬러 오르는 31번 국도를 타고 봉화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용화리에서 자연치유 생태마을인 대티골로 들어가는 6.1㎞ 길이의 대티골 숲길을 만난다. 지금은 울창한 숲길로 바뀐 옛 31번 국도를 걷다 보면 희망우체통이 있는 진등이 나온다. 빨간색 우체통에서 엽서를 꺼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초록색 우체통에 넣으면 일년 후 주민들이 엽서를 보내준다. 칠밭목까지 울창한 숲을 비집고 내리는 햇살과 알록달록한 원색의 단풍, 그리고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부드러운 낙엽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대티골 숲길 위쪽에 위치한 31번 국도는 영양과 봉화를 연결하는 길로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좋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오르면 길옆에 조성한 단풍나무 숲이 멀리 떨어진 일월산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한 뿌리에서 뻗은 가지인데도 단풍잎은 초록색 노란색 붉은색 등 다양하다. 하얀 억새와 어우러진 단풍이 그림 같다.

영양 북동쪽에 위치한 수비면의 수하계곡은 왕피천 상류로 자연경관보존지역. 계곡을 따라 색색의 단풍 옷으로 갈아입은 산들이 에메랄드빛 계류에 발을 담그고 있다. 노랗게 단풍이 들기 시작한 자작나무숲이 계곡에 반영을 드리운 모습은 환상적. 수하계곡에서 임도를 달리면 본신리의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 나온다. 본신리와 신원리 주변 3461㏊에 걸쳐 조성된 생태경영림의 숲길을 따라 걷다 만나는 단풍은 초록도화지에 붉은 물감을 뿌린 듯 선명한 것이 특징.

본신계곡에서 88번 국도를 타고 롤러코스터를 타듯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으면 영양과 울진의 경계에서 ‘동해의 차마고도’로 불리는 구주령을 만난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이 희미하게 보이고, 절벽을 수놓은 색색의 단풍은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를 향한다.

영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