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규태 (8) 호주서 펴든 성경속 ‘내가 곧 길이요…’에 전율
입력 2012-10-30 19:17
1980년대 초엽 호주 정부는 악명 높았던 백호주의(White Australian policy)를 철폐하고 스스로 아시아 국가임을 선언했다. 아시아 특히 동북아 국가와의 경제 지원 및 협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 첫 단계로 수도인 캔버라에 있는 호주국립대학(ANU) 안에 아시아학 대학과 태평양 연안 연구대학원을 설립하고 아시아 주요 국가의 교수를 초빙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부임한 유일의 국립대인 ANU에는 수백명의 가르치는 이가 있었으나 ‘정교수’는 30여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분들은 ‘교수’라는 호칭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물론 직급별로 호칭은 각각 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대학의 운영, 정책 수립 등 주요 업무도 모두 이 교수회의의 의결을 거쳐야 하며 교수연구비도 이곳에서 결정되고 지급될 만큼 막강한 힘이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정교수가 되지도 못한 채 정년퇴임을 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일상다반사다. 또한 한 학과에 한 명의 교수밖에 임용되지 못할 정도로 승진이 어렵다. 그리고 교수 호칭 뒤에는 꼭 경칭(Sir)을 붙여야 할 정도로 엄격한 계급사회이기도 하다.
그러한 대학에 나는 한국에서 받은 교수 직급 그대로 대우(경제적으로도)를 받고 부임하게 되었으며, 월급의 반을 내야 하는 세금도 그 당시 발효된 세법에 의해 면세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복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님께 날이면 날마다 감사하며 임지로 떠났다.
하지만 당시 나의 지병이던 니힐리즘이 그곳에서도 멎지를 않았다. 오히려 염세주의로 빠지게 되고 자살충동을 곧잘 느끼곤 했다. 부유하고 여유로운 것이 마음의 치유제가 되지 못했다.
ANU에 부임한 이후 사택이 마련될 때까지 1개월 남짓 나는 캠퍼스 안에 있는 임직원 전용아파트에 유숙했다.
계절이 정반대로 바뀐 데다 미국 대학에서 통용되던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등 갑작스런 환경변화 등으로 소화도 잘 안 되고 초췌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철저하게 초췌해지고 싶기도 했다. 술에 몹시도 약한 체질인데 간혹 정체를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 오기 전 앓고 있었던 우울증이 도졌다. 군사정권 하에서 감시를 받던 사회로부터 탈출한 후 마음이 한결 후련해진 듯하더니 억울한 필화사건을 생각할수록 견디기가 어려웠다.
‘정체를 잃는 것’이니까 어디서 잠들어야 하는지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귀소본능에 따라 숙소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숙소에 돌아와도 내 방 침대에서 자지 않았다. 내 방은 아파트 맨 위층에 있었는데 한 층만 더 올라가면 잘 정돈된 옥상이 가슴팍 높이만큼 두꺼운 벽돌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난간 위에 오르면 가까스로 누울 만큼의 넓이였다. “아차!” 하면 떨어져 버릴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죽음에의 야릇한 원망(願望)이 취중의 나로 하여금 그런 위험한 침상을 무의식중에 차지하게 했었는지도 모른다.
난간 위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오싹’ 소름이 끼치며, 순간 또렷한 의식으로 되돌아왔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인 듯 생생하다. 이렇게 타국에서 고독과 허무감에 젖어 생활하던 나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구내 피셔도서관의 한국학 코너에서 우연히 펴든 성경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구절이 얼어붙은 듯 눈 속에 박혀 나를 전율케 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빛이 다가왔다.
그때 문득 이런 시상이 떠올랐다. “영욕을 떨치고/이역만리에 와 밤을 지새면서/고작 깨달은 것은/사람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고뇌와 망각을 고루 주시는 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