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원 3000여 고아들에 그리스도 사랑을”…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

입력 2012-10-30 18:21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알려진 윤학자(일본명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1912∼1968) 여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대규모 기념대회(‘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정추진대회)가 서울과 목포에서 개최됐다. 윤학자여사탄신100주년기념사업회는 29∼31일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와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에서 기념대회를 진행 중이다.

윤학자 여사는 1928년 윤치호 원장이 설립한 고아원 목포 공생원에서 윤 원장의 아내로, 그리고 한국 고아들의 어머니로서 평생 헌신했다. 1968년 10월, 전남 목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3만여 시민이 운집해 애도했을 정도로 그의 헌신과 섬김은 지역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진하게 남겼다.

1912년 10월 31일 일본 고치(高知)에서 태어난 그는 7세 때인 1919년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전남 목포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목포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머니와 고등여학교 영어 교사인 다카오 마스터로(高尾益太郞)로부터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 최근 발간된 윤학자 여사의 전기 ‘진주의 노래’에서 저자 모리야마 사토시는 이 시절 그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일본의 정치상황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곤 했다고 기록했다.

윤 여사는 졸업 후 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윤 원장이 설립한 공생원에서 음악과 일본어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생원과 연을 맺었다. 이후 1938년 그는 윤 원장과 결혼하고 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공생원은 윤 원장이 목포 개척 전도 당시 동네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7명의 아동을 거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일에서 시작된 고아원이다.

‘공생원의 초대 어머니’가 된 윤 여사는 해방 후에도 공생원의 원생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 모리야마는 그의 책에서, 해방 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이 그를 박해하자 원생들이 ‘죽이려면 우리를 죽여라. 우리 어머니에게 손대지 말라’며 막아선 일화를 소개했다. 한국전쟁으로 윤 원장이 행방불명이 된 뒤 윤 여사는 홀로 공생원을 맡아 전쟁고아를 보살피며 헌신했다. 68년 윤 여사가 폐암으로 소천하자 목포시는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윤 여사가 돌본 3000여명의 원생을 비롯해 3만여 목포시민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윤 여사의 생애는 1997년 한·일 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통해 알려진 바 있으며, 공생원은 지금까지 모두 4000여명의 아이들에게 삶의 터전이 돼 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29일 개최된 기념대회에서는 ‘종교와 사회공헌’이라는 제목의 기독교계 인사들의 세미나가 진행됐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와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 미네노 다쓰히로 일본 요도바시교회 주관목사, 오리우치 아키라 일본 그레이스선교회 대표목사 등이 발제자로 참여했다. 기념대회는 30일부터 윤 여사가 평생을 헌신한 전남 목포에서 진행괴고 있다. 목포에서는 추모예배와 사랑과 평화의 제전, 기념식과 제정추진대회 등이 열린다. 또 목포 공생원에는 ‘윤치호·윤학자 기념관’이 개관된다.

최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