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변영인] 희망과 긍정을 보는 삶으로

입력 2012-10-30 19:16


우리 가족은 오래전 전원생활을 꿈꾸며 시골에 과수원을 마련했다. 그 마을을 지나가는 행인도, 동네 사람들도 우리만 없으면 과일을 따서 몰래 가져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조금은 달랐다. 나는 그 과수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잘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 이유는 그 과수원이 우리 가족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창조주께서 만드신 사랑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분이 계속 관심을 가지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곳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라고 고백하는 이유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사물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는 쌓아놓은 업적으로 오직 우리의 의만 드러내려고 한다. 이웃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우리들의 의(義)가 곧 절대척도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우리의 마음에 절망을 느끼는 것도, 아니 그 가운데 희망을 갖게 되는 것도 자유다. 긍정할 자유와 부정할 자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가지 자유와 그 선택 다음에 오는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절망과 부정의 자유는 벼랑에 떨어진 것이 되고 희망과 긍정의 자유는 희망의 언덕에 도달케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밝은 곳도, 어두운 곳도 동시에 있다. 웃을 만한 곳도 슬퍼할 만한 곳도 있다. 어느 곳을 향하여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어느 날 내 연구소 앞 바다에서 거센 풍랑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도 해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물을 캐어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내가 물어보았다. “이렇게 바람이 불고 풍랑이 거센 날도 바다에 들어가나요?”

“풍랑이 바다 위에 있지, 바다 속에도 있나요?” 그 해녀의 말에 또 한번 깨달음을 얻는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면 삶의 껍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들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이 해녀처럼 깊은 신앙의 바다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에서 흐르는 눈물 또한 보게 하소서! 온몸으로 끓는 사랑이게 하소서! 기쁨만 아니라 슬픔, 희망만 아니라 때론 절망,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가진 것이 적어도, 승리만 아니라 패배에도 감사하며 노력할 줄 아는, 불붙고, 매 맞아서 제 소임을 다하는 대장간의 쇠붙이들을 저는 압니다.

변영인(동서대 교수·상담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