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혈의 시리아, 자유와 평화를 꿈꾸다] 살인 강간 약탈… 대학살의 시리아 홈스를 탈출하다

입력 2012-10-29 21:19


<2> 알리야(가명)씨가 전하는 ‘대학살극 현장’ 홈스 탈출기

터키 이스탄불의 허름한 아파트 입구에는 작은 소년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남을 약속한 시리아인의 주소지를 들고 헤매다 때마침 시리아 국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소년을 만난 것이다.

“시리아인이니? 혹시 나를 기다렸니?”

아이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방이 세 개쯤 되는 작은 아파트에 들어서자 긴 치마와 히잡(중동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가리개)을 쓴 선량한 눈빛의 두 여인이 나와 반겼다. 시누이, 올케 사이인 두 여인은 웃으며 인사했지만 눈빛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어려 있었다. 아파트에는 두 가족, 13명이 함께 산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동행한 한국-아랍어 여성 통역인의 아기가 울었다. “날씨도 추운데 아기 옷이 너무 얇아요. 더 따뜻한 옷이어야 할 텐데.” 여인들은 기저귀를 가는 통역인에게 걱정하듯 말했다. 시리아의 아이들은 한국의 아기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정부군에 포위당한 시리아 홈스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한 달 동안 최소 700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했다고 지난 3월 발표한 학살 장소다. 홈스에서 탈출한 영국 사진기자 폴 콘로이는 “홈스의 바바 아므르 지역은 도망칠 곳 없는 도살장이나 마찬가지”라며 “시리아 상황을 내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됐으며 중세에나 있을 포위와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고 회고했다. 정부군이 전기와 통신, 언론을 차단하기 때문에 시리아 국민들도 홈스에 살지 않고서는 참상을 알 수 없다. 광주사태(5.18 민주화운동) 당시 다른 지역이 참상을 알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아기가 울음을 그치자 여인이 그곳에서의 참상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여인의 남편은 홈스의 초등학교 교장이다.

“고향인 홈스가 정부군에 포위됐어요. (자신의 조카를 가리키며) 이렇게 조그만 애들도 가리지 않고 죽였어요. 정부군이 홈스의 호올라 마을에 전화도 전기도 안 되게 막아서 며칠 동안 외부와 고립됐어요. 군인들은 어느 집이든 들어와 수색했어요. 저희들은 무서워서 시위에 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했어요. 아이를 죽이고, 그 과정을 엄마가 다 보게 한 다음 엄마를 죽이는 사건도 있었어요. 늙은 사람도 가리지 않았어요. 117세 된 할머니와 80세 된 아들도 죽여서 문 앞에 놔두었어요. 양떼를 몰아넣어서 다 죽여 버리듯. 휴지 공장에 다니는 저의 고모부와 가족 3명은 완전히 목이 뒤로 넘어 갈만큼 흉기로 목을 그어 죽였어요. 홈스의 바바아무르 지역에서는 군인들이 여성을 강간한 일도 있어요. 밤새도록 폭격 했어요. 저희 가족은 폭격을 맞지 않으려 집의 가장 중간에 위치한 좁은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 밤을 샜어요. 아이들은 옷장에 숨겼어요. 어느 날은 아침 여섯시에 폭탄이 크게 터지면서 벽이 크게 흔들렸어요. 애들이 어떻게 될까봐 죽을 수 없어서, 십오분 만에 황급히 옷만 챙겨서 집을 뛰쳐나와 시골로 탈출했어요.”

홈스가 반정권적인 도시였나요? 여인에게 물었다.

“아니요. 홈스에서 혁명이 시작되긴 했지만 처음에는 정권 타도가 목표는 아니었어요. 물, 전기가 부족해 고쳐달라고 시위했는데 총 쏘고 사람 죽여서 침묵할 수가 없었어요.”

여인은 친척들이 현재 시리아 내에 있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1년 전 홈스를 떠난 뒤 다시는 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 안전한 시골 마을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곳 또한 정부군에 포위돼 감옥으로 변해갔다. 시골마을의 임신한 이웃 여성이 검문에 막혀 병원에 나갈 수 없는 사건도 발생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만 것이다.

여인의 남편과 아들은 수배자다. 10대인 아들은 시리아 내 학살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페이스북에 올렸다 정치 수배자가 됐다. 아버지도 수배자가 된 이유를 물으니 여인은 짧게 말했다. “아이의 아버지니까요.”

시골 마을에서의 불안과 공포도 심각해지자 여인의 가족은 다시 탈출을 결심한다. 가족들은 친척이 사는 멤비지(터키와의 국경 근처)로 떠났다. 반정부 시위가 없는 멤비지로 가는 길은 검문을 통과하기가 그나마 수월했다. 검문을 통과할 때마다 여인은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세 시간 만에 멤비지에 도착했다. 살았다는 안도감. 그곳에서 이틀을 묵고 다시 터키 국경으로 향했다.폭격 당한 건물이 즐비한 참혹한 도시 사르마다를 지날 때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여인의 가족들이 다섯 달 전 이스탄불의 한 아파트에 세를 얻었고 올케 가족이 두 달 전 탈출해 이 집에 들어왔다.

홈스는 그리운 추억이고 또 고통이다. “홈스 집에 내 가방 있는데.” “장난감도 자전거도 거기에 있어.” 아이들은 평화로웠던 홈스를 추억한다. 그러나 여인이 이따금씩 “너 다시 시리아 가고 싶어?”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고개를 흔든다. 고향의 무엇이 그립냐고 묻자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파트! 내 아파트! 열심히 일 해서 장만했는데. (정권이) 다 부셔놨어!”

여인은 매일 밤마다 기도를 한다고 했다. “그래도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가고 싶어요? ‘신이여, 언젠가는 평화로웠던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해요.”

시리아의 가족들과 종종 통화한다. 시골 마을에 4일간 빵이 없었다는 이야기, 공중 폭격이 계속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소식은 곧 눈물이 된다. “날마다 웁니다. 몇 달 동안 매일. 형제자매들이 그 안에 있고 저는 이곳에 있는데 나만 이렇게 빠져나왔구나,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어요.”

타국의 하루는 안전하지만 외롭다. 시리아의 아이들은 거주증이 없어 터키 학교에 갈 수 없다. 아이들은 등교하는 터키의 아이들을 쳐다보거나 학교 정문을 서성이다 돌아오곤 한다고 여인이 말했다. 국제사회에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마치 카메라가 있는 것처럼 또박또박 호소하는 표현의 말을 했다.

“제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참상은 실제로 일어난 일의 부분의, 부분의, 부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사드(장기 집권 중인 시리아 대통령)라는 한 사람 때문에 나라 전체가 이렇게 돼야겠습니까? 이렇게 많이 죽고, 사람들은 학살당하는데 담을 쌓아놓으시나요? 시리아의 아이들을 보호해 주세요.”

시리아 난민 현황

“수리아, 수리아!”(시리아를 뜻하는 아랍어)

이스탄불의 ‘힐튼 가든 인’ 호텔에서 시리아국가위원회(SNC) 압둘바세트 시에다 위원장 인터뷰를 마치고 걸어가던 길이었다.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 대여섯명이 낯선 동양인 기자에게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사진기를 들이대니 활짝 웃으며 포즈를 잡았다. 무리 중에 유독 한 아이만 어두운 표정으로 양 손을 내저었다. 아이는 기자를 졸졸 따라오며 “수리아!”라고 반복적으로 외치고 뭔가를 호소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는 시리아 난민이기 때문에 사진이 찍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카메라 액정을 보여주며 사진을 삭제하니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지난 24일(현지시간) 집계한 통계보고서에 따르면 등록 시리아 난민은 28만88명이다. 터키에 10만1834명을 비롯해 레바논 7만3393명, 요르단 6만89명, 이라크 4만4772명 순이다. 난민 신청 절차를 밟고 있는 예비 난민까지 더하면 총 36만2719명이다. 그러나 실제 난민은 이를 훨씬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난민 등록’ 기록 때문에 추후에 정권으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두려워해서다. UNCHR 멜리사 플레밍 대변인은 “미등록 난민이 시리아 인접국마다 수만명은 더 있을 것”이라고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난민 상황은 열악하다. UNHCR이 담요와 방수포(防水布), 전기 히터 등 다가오는 겨울 용품을 준비하고 있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숫자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SNC의 난민촌 담당자 무띠으 알바띤(44)는 “인접국에 난민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특히 아랍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의사와 의료약품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시리아 인접국 또한 대규모 난민으로 인한 자국민의 일자리 부족과 물가 상승 등의 고충을 겪고 있다.

이스탄불=글·사진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