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샘] 비 오는 날의 풍경
입력 2012-10-29 18:37
무명자(無名子) 윤기의 문학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반부 두 구는 수면에 명멸하는 빗방울을 읊었다. 금방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덧없음을 빗방울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빗발은 제 마음대로 내리지 못하고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윤기는 어지러이 비 내리는 날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다. 빗발은 제 마음대로 내리지 못하고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찰나의 순간에 방울이 만들어지고, 그보다 더 짧은 시간에 방울은 깨어진다.
하루 종일 수면 위엔 생성과 사멸의 순환이 무수히 반복된다. 무한한 시공의 우주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사는 세계란 일체 물방울 아닌 것이 없고, 우리의 삶도 물방울 아닌 것이 없다. 좀더 좁혀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보면 나날이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과 희로애락의 다단한 감정도 물방울 아닌 것이 없다. 윤기는 무수히 명멸하는 물방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후반부는 비 오는 날 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읊었다. 비 오는 날 연기가 하늘 높이 피지 못하고 초가지붕 위에 낮게 깔려 있다. 한 줄기 흰 연기의 등장과 함께 눈앞에 어지러이 춤을 추던 빗방울과 귓전을 때리던 요란한 소리가 일제히 사라졌다. 비할 데 없이 동적이던 화면은 갑자기 정지했다. 기묘한 반전이다.
이 극적인 대비 때문에 ‘홀욕류(忽欲留)’에서 시구가 끝남과 동시에 일체의 동작과 소리가 멈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운은 시구를 넘어 동작과 소리의 정지선을 넘어 강렬하고 길게 이어진다.
시 속에는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떠한 교훈과 철학적 언급도 없다. 빗방울과 연기를 통해 동(動)과 정(靜)을 선명히 대비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로 하여금 삶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 시가 지닌 힘이다.
이규필(성균관대 대동문화硏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