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그대, 어떤 광해를 선택할 것인가

입력 2012-10-29 17:52


영화 ‘광해’가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에 드러난 광해의 이중성, 양면성은 현대 상담심리학에 나오는 교류분석과 대상관계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광해는 암살 위협을 느끼며 극도의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그래서 도승지 허균을 불러 자신의 대역을 찾으라고 명한다. 결국 허균은 광해와 똑같은 외모를 가진 술집 만담꾼 하선을 찾아내 용포를 입힌 뒤 편전에 앉힌다. 그런데 광해가 상궁과의 잠자리 후 양귀비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린다. 그래서 하선은 어쩔 수 없이 대역이 아닌 진짜 광해로서 15일간 조선을 통치하게 되면서 궁궐은 소용돌이친다.

광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관계이론을 알아야 한다.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우리 안에 참 자아, 거짓 자아가 공존한다. 참 자아는 타고난 본성과 성품이며 거짓 자아는 환경에 의해 왜곡된 자아다. 이것을 영화에 적용하면 원래 광해의 참 자아는 착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 그런데 조정 간신과 사악한 정치꾼들의 위협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서서히 주색잡기와 살인을 일삼는 미치광이 폭군으로 변질된다. 영화에서 광해가 쓰러지고 대신 하선이 용포를 입고 편전에 앉는 장면은 광해 안에 있는 거짓 자아가 잠시 죽고 본래의 참 자아가 깨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하선이 처음에는 마네킹 군주 역할만 하다가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조선 왕 최초로 청나라를 향해 자주외교를 천명하고 대동법을 통한 조세혁명을 단행한다. 그리고 중전에게도 순수한 사랑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생(윤정)도 죽음의 위기에서 살려준다. 그럴 즈음 진짜 광해가 의식을 회복한다. 아마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진짜 광해가 깨어나지 않고 차라리 가짜이지만 또 다른 광해가 계속 선정을 펼쳐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의식을 되찾은 진짜 광해는 ‘승정원일기’를 보고 시기와 분노를 일으킨다. 또 다시 거짓 자아가 점점 살아나 참 자아, 하선을 죽이려고 한다.

이것은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로마서에 보면 우리 안에 선하게 살고 싶은 자아가 있는데 옛 자아가 그 선한 본성의 자아를 싫어하고 죄의 종으로 만들려고 한다(롬7:22-23). 한국교회 안에도 참 자아를 잃어버리고 육신의 욕망을 따라 바벨탑을 쌓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겉으로는 교회와 교계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거짓 자아의 위선일 뿐이다. 한국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겉으로 나타나 있는 진짜 광해가 죽어야 한다. 대신 우리 안의 또 다른 광해, 진짜 자아가 깨어나야 한다. 광해도 결국 나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폐위되고 조선은 훗날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남한산성의 치욕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대 안에 광해의 이중성은 없는가. 우리 안에 진실한 광해, 참 자아를 찾을 때 개인의 삶도 치유되고 한국교회도 회복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거짓 자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자아를 살려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는 광해, 두 얼굴의 희망과 절망 앞에 서 있다. 그대는 어떤 광해의 얼굴을 선택할 것인가.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