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규태 (7) “두드리면 열리리라” 휴전후 첫 DMZ 르포 특종
입력 2012-10-29 21:34
돌이켜 보면 우리 또래(팔십대)만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세대도 드물 것 같다. 일본 제국주의 말기의 혹독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이른바 ‘태평양 성전’ 중에 초등학교에 다녔고, 그 어린 나이에 호된 강제노동 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했던 혼란기에 중학교를 다니면서 이념 대결의 희생양이 되어 감방에 드나들기 일쑤였다. 나도 ‘국립대학안’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적이 있고, 학교 당국의 무책임함에 못 견디고 전학을 했다가 그곳에서도 따돌림을 받는 등 어려운 고비가 많았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당시 과반의 학생들이 으레 겪었던 역경이었다.
중학교(당시는 6년제)를 채 마치지 못하고 6·25전쟁이 일어나 미처 피난가기도 전에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됐다. 그 바람에 을지로에 있는 서울극장 자리에 마련된 인민군 임시 인쇄공장에 문선공으로 징용되어 밤샘 노동을 하기도 했으며, 급기야 인민군 선전부대에 편입되기 직전 탈출했다.
수복 후에는 국민방위군에 징용되어 한동안 기아선상에서 헤매기도 했고 정규군에 들어가서는 ‘소모 장교’감이 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내 중학교 동창 중 80%는 6월 전쟁 초기에 전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나는 다행히 살아남아 국민훈장 모란장도 받고 국가공로자 서훈을 받고는 있지만 걷잡을 수 없는 혼란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부분의 삶을 지내다 보니 역경이 꼬리를 물고 다가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부조리와 싸우곤 했다. 신문기자로 생활하는 동안에는 그런 싸움이 심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취재활동 중 크게 보람을 느꼈던 일도 없지는 않았다. 수습기간 중이었다. 특종 기사를 캐내면 딱지를 빨리 뗀다는 소식에 나는 군복무 중 가깝게 지냈던 DMZ의 미군 패트롤 부대장을 찾아가 155마일 휴전선 취재를 부탁했다. 그 당시만 해도 휴전 직후이고 북측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으나 기어코 나는 이를 성사시켜 내 르포가 신문 1면 톱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런 추진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때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인용하며 격려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인용했던 성경 구절은 가물가물해서 생각이 잘 안 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취재 경쟁도 별로 없고 비교적 시간 여유가 많은 경제부 기자를 선택할 수 있었고 그 바람에 대학 교수로 직업을 바꾸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나 외에도 그 당시 그런 동료들이 많았다. 신동준 시인, 서기원 소설가도 나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물론 대학가에서도 4·19와 5·16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정비안’ 문제 등으로 역경과 좌절은 끊이지 않았고, 한때는 니힐리즘으로 치닫기도 했다.
당시의 니힐리즘은 내 젊은날의 붕괴와 부조리 풍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무렵의 풍조는 지금으로선 얼핏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겠지만 “모든 게 허용되어 있다” “모든 것이 허용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와도 통용된다. 그래서 염세주의로 빠져들기 일쑤였다.
카뮈는 “그러한 니힐리즘은 지친 인간으로 하여금 정열적인 주의력을 가지고 죽음을 응시하게 하는데, 그러한 열중이 자유롭게도 한다”고 했지만 이 무렵 나는 요한복음 14장, 그리고 특히 하늘나라의 비의(秘義)를 알게 되면서 기독교적인 실존주의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니힐리즘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뜻하지 않았던 구원의 손길이 나를 끌어안았다. 1982년 3월 호주국립대학교로 부터 전임대우 교수 로 초청을 받았다.
그 당시 호주는 경제적으로 난국에 처해 있었다. 영국이 유럽 공동시장에 가입함으로써 보호막이 걷히고, 양국 간 경제 유대가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