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하늘 끝, 유한한 나와의 만남… 최재은의 ‘오래된 시(詩)’

입력 2012-10-28 18:35


전시장에 들어서면 사방이 캄캄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밤하늘의 별빛이다.

정면과 좌우의 세 벽면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어둠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별을 감상하려고 하니 여자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전시장에 웬 매너 없는 관람객?

하지만 이것도 작품의 일부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 설치된 최재은(59) 작가의 영상작품 ‘유한성(Finitude)’이다.

영상은 독일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약 50㎞에 위치한 스토르코프의 밤하늘을 8시간 동안 세 방향에서 촬영한 것이다. 정지된 상태 같지만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는 밤하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두 소리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작가가 돌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녹음한 것이다. 2007년 이후 5년 만에 갖는 국내 개인전에 작가는 신작 40여점을 내놓았다.

다음 달 22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 타이틀은 ‘오래된 시(詩)’. 그동안 흙이나 나무 같은 소재를 끌어들여 생명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는 최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1970년대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 미술에 빠져든 그는 “몇 년 전 독일로 이주했는데 그곳의 순환적이고 생태적인 환경을 접하면서 하늘에 눈을 뜨게 됐다”고 설명했다.

“베를린 등 북유럽은 겨울에 흐려서 작가들에게 빛이 중요하게 다가와요. 하루 2∼3시간씩 하늘을 보면서 무한한 하늘과 유한한 나의 만남이 이뤄졌지요. 이번 전시에서는 내 작업이 개념미술로 전환된 것이 핵심입니다.” 밤하늘의 별빛을 관람한 뒤 15분 정도 지나면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을 이끌던 도쿄 소게츠회관에서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을 주축으로 한 전위예술가집단 ‘플럭서스’와 교류하기도 한 작가는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전시에 이례적으로 외국인으로 참가해 국제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01년 영화 ‘길 위에서’로 감독 데뷔한 그는 2010년 유서 깊은 도쿄 하라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초대전을 가져 화제를 모았다.

이전의 작품이 열정적이고 역동적이었다면 신작들은 관조적이고 고요하다. ‘정중동(靜中動)’의 이미지 속에 흐르는 영원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장면을 1분 간격으로 촬영한 사진 50점을 모은 ‘Verse(시)’는 생명 탄생의 시공간을 표현한 작품이다. 순간순간 떠오른 단어와 문장들을 낡은 책 속지에 적은 ‘만물상’ 25점도 보여준다.

“내가 나무였을 때/ 내가 의자였을 때/ 내가 열매를 맺었을 때/ 내가 약이 되었을 때/ 내가 그림자를 남겼을 때/ 내가 대지를 품에 안았을 때/ 내가 불이 되어도/ 나는 종이로서 만족한다.” 종이의 본질, 물질의 본질, 나아가 삶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글귀다. 영상과 사운드, 사진과 드로잉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이 현대 도시인들에게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02-735-8449).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