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기태] 죽간이 곧 전자책이다

입력 2012-10-28 19:43


지난 20일과 21일 이틀 동안 일본 도쿄경제대학에서 열린 제15회 국제출판학술회의에 다녀왔다. ‘전환기 미디어 시대의 출판’이란 대주제 아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16명의 학자들이 발제하고 50여명이 토론에 참여한 이번 회의에서 확인한 공감대는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빌 게이츠가 했다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는 말도, “결국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말라르메의 말도, 그리고 “독서는 완성된 사람을 만들고, 담론은 기지 있는 사람을 만들고, 작문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는 베이컨의 말도 이젠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토론 주제는 “왜 사람들은 점점 책을 멀리하는가?”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죽간이 곧 전자책이다

매체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류 최초의 복제술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전시기를 거쳐 문자가 등장함으로써 마침내 읽기를 통한 다양한 문명을 개척할 수 있었다. 점토판을 비롯한 갑골, 파피루스, 양피지, 죽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양한 필사매체들이 오랜 기간 인류를 깨우치고 이끌어왔던가. 하지만 그렇게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온 우리 문명이 편리성을 추구하면서 라디오와 음반 등 듣기매체를 만들어내는가 싶더니 영화, 텔레비전 등 아예 듣고 보는 매체까지 만듦으로써 우리는 바야흐로 읽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읽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매우 편리한(?) 세상에 맞닥뜨린 것이다.

읽는 일이 어려웠던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해야 하는 책이나 잡지, 신문 등 독서매체의 본질 때문이었다. 결국 오늘날에는 아날로그 시대의 정점을 구가했던 텔레비전마저 밀어내고 인터넷과 모바일 등 디지털 시대의 총아들이 등장함으로써 ‘읽기’ 혹은 ‘보기’라는 형식마저 무색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상은 왜 좀더 평화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며 서로 화해하지도 못하는가. 심지어 역사(fact)와 철학(truth)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지적 미숙아로 자라고 있는가.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사돈의 팔촌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경조사 일정을 그리도 잘 기억하셨건만 우리는 왜 휴대전화 하나 잃어버리면 스스로 암흑의 나락에 빠지고 마는가.

이 모든 것이 물론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옛 그리스인들이 도서관을 ‘영혼을 치유하는 장소’로 명명했었다는 점, 그리고 독서는 교향악의 연주와도 같이 여러 가지 지적 기능들이 한데 어울려 통합적으로 작용하는 지적 활동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독서로 인간 완성의 길 익히길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말해주듯 본질적으로 독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바람직한 정서, 즉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인간적 감수성은 물론 예술적 감각과 도덕적 심성을 길러준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 또는 바람직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함과 아울러 웬만한 어려움이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하겠다는 의지를 길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책을 읽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읽는 것일 게다. 읽고 싶은데 읽을 만한 환경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닐까. 알맹이(내용)보다 껍데기(기술)에만 치중하는 정책이 문제는 아닐까. 여기저기서 책 잔치가 한창인 요즈음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죽간이 곧 전자책(e-Book)이다’는 말의 뜻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김기태(세명대 교수·미디어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