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태만] 루쉰과 ‘부러진 화살’
입력 2012-10-28 19:20
지난 9월 말 중국 사오싱(紹興)에서 개최된 제21회 금계백화장에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부러진 화살’이 최고인기외국감독상을 수상했다. 우리의 대종상 못지않은 이 영화상 시상식에서 정 감독의 수상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한국 관객에게 낯선 영화제이기도 하거니와 직전에 있었던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과 직후에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 소식에 묻혀 국내 언론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사오싱은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고향이다. 생가 터는 물론 루쉰의 유적 유물이 즐비해 ‘루쉰으로 먹고사는’ 도시이다. 해마다 개최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금계백화장으로서, 또는 리얼리즘을 영화문법의 기초로 삼아온 중국 영화계로서 루쉰의 고향을 선택한 것은 필연이다. 계몽과 프로파간다를 강조해 온 중국문예사의 궤적에 조응하듯 ‘아Q정전’ ‘죽은 이를 그리워함’ ‘약’ ‘상림수’ ‘축복’ 등 루쉰의 대표작들이 영화로 제작되어 국민교재로 사용되어 왔다. 이들 원작의 무대가 곧 사오싱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오싱과 루쉰과 중국영화는 불가분의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남자(淮南子)’에는 요 임금 때 동시에 뜬 열 개의 태양 중 아홉을 활로 쏘아 떨어뜨려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했다는 영웅적 궁수 예(?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1926년 루쉰은 이 신화적 모티프를 차용해 단편 ‘분월’을 발표했다. 국민당의 백색테러가 난무하던 암울한 시기에 예 같은 영웅의 대망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 속 예는 더 이상 신궁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초라한 범부다. 가난을 참지 못한 아내 항아가 남편이 감춰 두었던 신약을 훔쳐 먹고 신선이 되어 달로 달아난다. 예는 항아를 활로 쏘아 맞히려 하지만 여의치 않자 분노로 절망한다. 더 이상 신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2년 사오싱에 ‘부러진 화살’이 날아들었다. 한국에서 개봉 당시 TV토론 주제가 될 정도로 극단적 논쟁의 중심에 놓였던 ‘부러진 화살’이 중국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수용될 것인지는 만인의 의문이었다. 금계백화장은 주로 중국의 주류 영화, 이른바 주선율(主旋律) 영화를 진흥하기 위해 중국문화부 산하의 영화가협회가 주관하는 국가주도형 영화제이자 시상식이다. 때문에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다분히 체제순응적인 작품들이 출품되거나 수상해 왔다. 이런 영화제에서 수상할 수 있다는 것은 중국 문화정책의 변화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 16기5중전회(2005년 10월)에서 ‘중국 11차 5개년 규획’이 발표되었고, 이 규획(program)을 문화부문에 적용한 ‘국가 11·5규획 시기 문화발전규획 요강’은 문화가 더 이상 ‘사업’이 아니라 ‘산업’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요강은 “복잡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막강한 경제력과 과학기술 및 국방력뿐만 아니라 강대한 문화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인식 하에 “문화산업을 적극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적시했다.
아울러 문화개방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국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라도 대외 문화교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방과 교역을 전제한 문화정책 전환은 문화국수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지난 시기와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자본의 힘과 자본의 기획에 의한 상업화로 선회를 확고히 한다. 분명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어 머릿 속에 깊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층 제고된 감상능력을 갖추어 가고 있는 중국 관객들의 힘이다. 금계백화장 주최 측은 당국을 부정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불순한 의도’에 대한 시상을 주저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부러진 화살’의 승리는 한국 사법제도의 권위주의와 강고한 권력의 카르텔이라는 이 불편한 진실을 간파하고 극장을 가득 메운 중국관객들의 승리에 다름 아니다.
김태만 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