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찬희] 응답하라, 1608

입력 2012-10-28 19:20

미시(未時)에 찹쌀밥이 수라상에 올랐다. 갑자기 기(氣)가 막혀 위급한 상태에 빠졌다. 어의(御醫) 허준(許浚) 등이 진찰을 했지만 훙(薨)하였다. 선조 재위 41년째인 1608년 2월 1일의 일이다. 왕권은 동궁(東宮)에게 넘어갔다. 동궁은 임진왜란 중에 피란길에 올랐던 아버지를 대신해 분조(分朝)를 경영하기도 했다.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공빈 김씨(恭嬪金氏) 소생인 이혼(李琿).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 분주했다. 동아시아 3개국(왜·조선·명)을 전란으로 몰아넣었던 임진왜란은 조선의 경제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900만명에 이르던 인구 가운데 200만명이 죽었고, 170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는 30만결 정도로 급감했다. 국가의 세입은 전쟁 전의 2∼3% 수준에 머물렀다.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백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정은 다급했다. 재정이 든든해야 경기부양도 가능하고, 복지도 가능하다. 황폐화된 경작지를 복원하는 일에도 나랏돈이 든다. 고단한 삶을 사는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한 해에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납을 쌀로 걷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도입하고, 경기도에 시범 시행을 했다. 대공수미법은 훗날 대동법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 대동법 실시로 백성들이 내야 하는 세금은 종전보다 5분의 1로 줄었다. 재정이 늘어나고 민생은 살아났다. 숨이 넘어가던 조선은 기사회생했다.

기득권층의 반발 속에 대동법은 차근차근 뿌리를 내렸다. ‘이식위천’(以食爲天·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네 글자에 담긴 신념 때문이었다. ‘민생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는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문구에는 권력집단의 처절한 고민과 반성이 담겨 있다.

1608년으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2012년. 대선 후보들은 앞 다퉈 경제 민주화, 복지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하지만 핵심은 빠졌다.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 이후 가계 살림은 팍팍해지는데 기업만 성장을 거듭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4년 동안 연평균 실질소득이 3.2% 늘었지만 가계는 2.4%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기업은 16.1%나 치솟았다. 가난한 국민, 가난한 가계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민생을 최우선에 뒀던 그들처럼 대선 후보들도 치열하게 ‘이식위천’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김찬희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