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규태 (6) 내 예술혼 원천은 외할머니 품속에서의 찬송가
입력 2012-10-28 20:34
내가 잔뼈가 굵어진 곳은 광주(光州)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의 한촌(寒村)이다. 송강 정철이 외로울 때면 즐겨 찾던 식영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송순, 이서, 유희춘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박용철, 김현승 등도 이 고장 출신 시인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문화의 변방이요 유배지이기도 했던 고장이다. 문화 전통이 없는 고장에서 문인이 적잖이 나왔다는 것은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역(逆)으로 문화적 토양과 전통이 없었던 각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기가 도리어 용이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선친은 폐결핵 환자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핵에 특효약도 없었고 전염되면 결혼 생활은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선친은 이런 사실을 속이고 모친과 결혼한 후 채 석 달도 안 되어 요절하셨다.
나를 난산한 후 어머니는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실의 끝에 우울증에 빠졌다고 한다. 넉넉한 농장주이면서 변호사 일까지 맡고 계시던 외조부님은 보다 못해 억지로 어머니를 일본으로 유학 보내셨다.
그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을 늘 외할머니와 함께 외진 딴채에서 외롭게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도 집 근처에 교회가 있어 그나마 주일에는 여러 어린이와 어울릴 수는 있었지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외할머니 품속에 안기어 축 늘어진 빈 젖꼭지를 빨며 자랐다. 할머니는 내가 안쓰러워 어처구니없는 응석도 잘 받아주시고 자장가나 민요를 곧잘 구성지게 불러주셨고 교회에 다니시면서부터 어설프게 옛 노랫가락으로 찬송가도 불러주셨다. 부지불식간에 이런 환경과 할머니의 노랫가락이 내 정서 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외진 마을에서 단절된 삶을 영위했던 내가 초등학교 시절 곧잘 동요도 지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시도 끼적였으며, 고등학생 때는 합창단에도 가입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것도 할머니의 그 흥얼거림이 어린 무렵부터 내 ‘끼’를 일깨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요를 쓰다가 차츰 시조, 자유시로 옮겨가면서 동향 선배들의 자극 또한 크게 받았으리라고 여겨진다. 거기에다 초등학교 동급생이었던 권일송, 안도섭 그리고 1년 후배인 박봉우와의 경쟁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이미 고인이 된 권일송은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 있어서 나의 경쟁 상대였다.
당시 할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중에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라는 구절이 특히 내게 힘이 되고 아직도 기억이 새롭다.
‘한뫼의 종합분석’이란 시에서 그는 장난스레 이렇게 노래했다. “복도 많아 교수에, 평론가에, 박사 나으리/호떡집에 불난 듯이 지구촌을 누비고/카메라, 그림 솜씨에도 뛰어나 아름다운 이방 처녀들을 설레게 하기도 하는 미남/특히 탁월한 건 여성 관리/그것만은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노 하우’/꽃밭에 나비 부르듯 예쁜이 틈에서 늘 행복해 뵈는 그는/탱고도 권일송 다음 가는 명수이고/노래는 영원의 맞수다.”
‘영원한 맞수’이기를 바라던 그도 이미 이승을 떠난 지 이십년이나 됐다. 그의 넉살이 그립다. 인생은 정말 무상하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쟁을 하며 어려움을 견뎌가며 오늘에 이르렀다. 고비마다 절망하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다. 내게 주어진 역경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담긴 섭리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나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연날리기를 즐기곤 했다. 아득히 먼 하늘을 향하여 연실을 마구 풀어내면 가장 멀리, 아니 하늘나라에 닿을 듯 가장 드높이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이런 꿈들이 나로 하여금 머나 먼 나라, 알지 못하는 미지의 나라를 찾아 헤매고, 이 같은 자유분방함이 자연 나의 삶, 나의 문학 세계에 배어들게 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