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나는 솔로(solo) 신학자
입력 2012-10-26 18:35
지금까지 나와 친분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내가 신학박사 논문을 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내가 무얼 썼는지 읽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강대 프랑스문화학과의 은사이신 최현무(필명 최윤) 선생님께서 몇 년 전 내 박사논문을 청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논문을 드린 지 일주일 만에 돌아온 답은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논문의 키워드가 프랑스어 사전에도 없는 단어이므로 당연한 대답이었다. 온통 정신이 팔려 그게 우주의 전부인 양 짧지 않은 세월을 쏟아 부었던 내 공부가 먼지알갱이처럼 미시적인 것이었음을 이때가 되어서야 깨달았으니 나라는 사람은 어지간히도 아둔하다.
내 공부는 여전히 독백일까
최현무 선생님 이래로 내게 논문을 청한 사람은 없고 이런 까닭에 내 논문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비밀한 무언가가 돼 버렸다. 그런데 귀국한 지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쓴 논문의 내용을 거의 잊어버렸다. 가끔씩 논문을 들춰 보노라면 나도 모르는 낯선 이야기가 줄줄이 등장하는 것에 새삼 놀라곤 한다. 이젠 나도 잊어버린, 그래서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내 논문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진짜 비밀로 들어가 버렸다.
알아주는 다른 이 없이 그저 하나님만 아시는 듯한 솔로(solo) 신학은 비단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몇 년 전 일본 센다이에서 아시아·태평양 교부학회(APECS)가 열렸다. 나는 국내 학자 너덧 명과 동행했고 프랑스어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무슨 독백이었나, 함께 참여했던 국내학자 중 내가 뭘 발표 했는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 계기를 통해 나는 프랑스어로 된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 처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 다음 해 호주 멜버른에 가서는 되지도 않는 영어로 발표를 시도했다. 20분간 논문을 요약하여 읽고 나서 질의 응답시간이 되었는데 어떤 호주 여성 목사님이 손을 들어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I can understand nothing.”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제목도 모르겠고 내용도 단 한 줄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 하지만 그가 모르는 걸 난들 어떡하랴. 몰라도 그냥 가만히 있어 주었으면 내가 좀 덜 곤란했을 것을, 모르는 걸 굳이 모른다고 할 건 또 무언가.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질문 아닌 질문이 유일한 질문이었던 까닭이다. 그나마 무게 있는 몇몇 학자가 내 논문을 이해하고 학술지에 게재해 준 것이 다행이었다.
솔로인지 홀로인지 하는 나의 고집은 계속되고 있다. 올 5월 나는 토론토에서 멀지 않은 워털루대학(Waterloo University)에 가서 캐나다 연례 인문학회에 참여했다. 20분가량의 내 발표가 끝나고 질의 응답시간이 됐다. 사회자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청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헛기침 소리조차 없는 적막함이 순간 밀려오며 개미새끼 하나 미동도 않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속으로 ‘그래도 한 명쯤은 손을 들겠지 설마 하나라도 질문이 없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끝내 질문은 없었다. 여태껏 여러 번 학술대회에 참여했지만 대학원생의 발표라도 질문이 있는 게 상례인데 단 하나의 질문도 받지 못한 발표는 내 경우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진기록은 웃고 넘어가기에는 좀 낯 뜨거울 뿐 아니라 비행기 표며 만만치 않은 숙식비가 적지 아니 아깝게 여겨진다. ‘내 공부는 여전히 독백일까’라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이해 받지 못하는 솔로 신학으로 냉소하듯 자평하지만 이런 유(類)라도 사막 기독교인들의 솔로 신앙에 비하면 지독하게 세속적인 그 무엇이다. 마카리오스라는 유명한 사막 기독교인은 세상을 버리고 대(大) 사막으로 물러나서 홀로 살았다. 사막의 현자 안토니오스도 수십 년의 세월을 독거하며 진정한 솔로로서 살아간 적이 있었다. 사막 기독교인들은 홀로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 우주적 과업이라고 생각했기에 모든 걸 포기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외로이 말씀 앞에 서서 영혼의 깊은 곳을 바라보아 우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런 솔로 신앙이야말로 비할 바 없이 우주적인 것이리라(시 131:2).
스스로 영혼을 바라보는 게 최고선
홀로 살아가는 것이 외딴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사막 기독교인들도 잘 알고 있던 바였다. 같이 살아도 마음으로 홀로 살아갈 수 있고, 홀로 살아가지만 사념으로 동요돼 무리와 함께 살아갈 수도 있다. 모여 살든가 홀로 살든가 하는 삶의 외형은 부차적이다. 어떻든 내 영혼을 홀로 대면할 수 있는 그런 자세라면 족한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관계없이 솔직하고 진실하게 스스로의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 최고선이다.
사실 혼자 하는 공부든 폭넓은 대중적 공감대를 얻는 공부든 그게 무슨 문젯거리 일까. 내 영혼의 떨림과 흔들림을 고요히 되돌아보는 것은 책을 뒤지며 하는 공부와는 비길 수조차 없이 중한 것이다. 책에 취해 교만이나 자만 속에서 길을 잃곤 하는 나는, 말씀 앞에서 내 영혼을 스스로 돌아봄으로써만 겨우 제자리로 되돌아온다(시 131.1). 그래서인지 솔로 신학이란 푸념조차도 아무 것도 아닌 무(無) 따위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혼의 독(毒)이 아닐까 자문해 본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