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환의 해피 하우스] 용서라는 약

입력 2012-10-26 18:30


긍정심리학 교과서들의 목차를 보면 설교제목으로 착각할 ‘용서를 실천하라’ ‘용서에 이르는 길’ ‘용서를 배워라’ ‘용서받기보다 용서하라’ 등의 주제들이 나온다. 최근 이처럼 용서의 생리심리적인 효과에 관한 연구 발표가 활발하다. 이 칼럼 제목 ‘용서라는 약’도 긍정심리학 교과서들을 종합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마시 스모프의 ‘이유 없이 행복하라’에 나오는 제목이다. 스모프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 에바 코어가 자기 가족들을 죽이고 쌍둥이 자매를 실험용 마루타로 사용한 나치를 용서하면서 했던 말을 인용한다.

“나는 모든 인간이 과거의 고통을 벗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물론 희생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죽은 내 가족이 내가 평생 고통과 분노 속에서 살아가기를 과연 원할까 하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용서합니다. 용서는 자신을 치유하고 자신의 힘을 되찾는 행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기적의 치료제라고 부릅니다. 돈도 들지 않고 효과가 좋을 뿐 아니라 부작용도 없는 약 말입니다.”

심장전문의 메이어 프리드먼 박사팀의 연구에 의하면 상처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되새기는 분노와 적개심은 심장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연구에서 다양한 생리심리적인 측정치들이 대학생들에게서 조사되었는데, 이들은 자기가 당한 범죄에 대해 용서하는 것과 용서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였다. 용서하는 집단 학생들은 범죄자에 대한 인간애로 용서해 주었다. 용서하지 않는 집단 학생들은 범죄로 인한 상처를 되새기며 범죄자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

그 결과, 용서하지 않는 집단 학생들에게서는 심박동과 혈압 상승 등의 심장병 반응이 더 관찰되었고, 분노와 슬픔의 부정적 감정이 더 많이 보고되었다. 반면에 용서하는 집단의 학생들에게서는 더 낮은 생리적 반응, 더 긍정적인 정서 그리고 더 큰 통제감이 관찰되었다. 비록 단기간의 연구지만, 이런 결과들은 용서의 생리심리적인 효과를 확인해 준다. 용서가 분노와 적개심의 무서운 독성에 대한 해독제인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가장 풍요롭고 화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무슨 한(恨)이라도 풀듯이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살률과 이혼율이 급증하고, 우울증과 폭력 발생률도 매우 심각하다.

한은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다. 다른 민족에게는 원(怨)의 정서는 있어도 한은 없는 듯하다. 원은 복수함으로써 풀어지는 데 반해 한은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혼자서 감내하고 참으며 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화병이 많다.

화병(火病)은 울화병(鬱火病)의 줄임말로, 화(火)가 쌓여서(鬱) 생긴 병(病)이다. 화병은 미국정신의학협회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4판(DSM-Ⅳ)’에 ‘Hwa-byung’이라는 한국어로 정식 표기되어 한국민속증후군으로 규정되고 있다. 영어로는 분노증후군으로 번역되며, 분노의 억압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자살, 이혼, 우울, 폭력 등의 어둡기 짝이 없는 사회 지표들은 한 맺힌 분노를 용서하지 못하여 나타나는 화병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만의 것일까?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으며 “어떻게 해야 우리의 가슴속에 맺힌 한들이 풀어질까… ‘용서라는 약’을….” 절규한다.

로버트 홀든은 용서는 ‘마음속의 분노를 지워버리는 멋진 지우개’라고 했다. 오늘은 해피 하우스 상비약통과 필통을 ‘용서라는 약’과 ‘분노 지우개’로 가득 채우는 날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서울신학대학교 상담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