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공탁금-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미군 포로 급여 내역 있는데 조선인 기록 1건도 없었다

입력 2012-10-25 21:39


4회 : 잡아뗀 日, 방조한 美-전후 6년의 잘못이 60년 미해결로 남았다

홋카이도 삿포로시에서 200㎞ 떨어진 인구 1만5000명의 소도시 아시베쓰시. 1999년 홋카이도청이 발행한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미쓰이가 운영했던 아시베쓰 탄광에는 1905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 동원됐다.

지난 18일 1905명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아시베쓰시를 찾았다. 시내에서 1㎞ 정도 떨어진 작은 강변 옆 잡풀이 우거진 600여평의 평지에서 숙소의 크기를 짐작하게 해주는 댓돌이 발견됐다. 강물을 끌어올려 식수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파이프 밑동과 화장실로 보이는 구덩이도 남아 있었다.

아시베쓰시 백년기념관 하세야마 다카히로 관장은 “당시 도면도를 보면 위쪽 3동, 아래쪽 5동의 목조 2층 건물로 200∼300명의 노무자가 수용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세야마 관장은 올해 초 이 숙소를 처음 발견해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에 제보했다. 제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아시베쓰 탄광에서 일했던 이시카와 이와오씨가 “전시 중 학대 받아 죽은 조선인 시신이 죽은 말과 함께 목욕탕 통에 넣어져 조선인 숙소 아래쪽 강가의 빈터에 묻혀 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홋카이도포럼은 지난 4월 모금활동을 벌여 피해자 유골 찾기 작업을 시행했지만 찾지 못했다. 수십 년 동안 홍수로 강이 범람하면서 휩쓸려 내려갔을 것이라는 추정만 내린 채 작업은 중단됐다.

홋카이도포럼 채홍철(57) 공동대표는 “당시 아시베쓰시 인구가 2만명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중 10%가 조선인 노무자들이었던 셈”이라며 “이들은 매일 3㎞ 떨어진 탄광까지 걸어가 노역을 한 뒤 이곳에서 피곤한 몸을 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광에서 함께 일했던 미군 포로수용소 포로들은 미군이 비행기로 공수해주는 식품을 제공받았지만 조선인 노무자들은 스스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세야마 관장은 설명했다.

백년기념관으로 이동해 아시베쓰시가 보관 중인 당시 외국인 노무자 관련 문서를 열람했다. 문서에는 중국인 노무자의 상세한 임금 목록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미군 포로들은 월 30엔의 급여를 받았다는 전후 연합군총사령부(GHQ)가 작성한 문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 노무자 1905명의 임금이나 전후 공탁금과 관련된 문서는 1건도 없었다.

역사학자인 하세야마 관장은 “중국인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승국 국민이었기 때문에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며 “10여년 동안 조선인 노무자 관련 문서를 찾아봤지만 실패했다”고 말했다.

하세야마 관장은 유일한 관련 사료(史料)라며 아시베쓰 한 시민이 쓴 육필 일기장을 보여줬다. 1939년 6월 17일자 일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대결투를 벌였다’고 적혀 있었다.

GHQ 내부 문서에 따르면 홋카이도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 노무자들의 임금 관련 서류는 GHQ로 이관됐다가 1951년 GHQ가 철수하면서 일본 대장성으로 이관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최종본이라고 우리 정부에 건넨 ‘조선인 노무자 공탁기록’에는 아시베쓰 탄광 노무자들의 명부는 없었다. 아시베쓰 탄광을 포함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노무자들이 노역했던 홋카이도 내 강제동원 작업장 311곳 중 일본이 건네준 공탁금 명부는 4건(1.27%)이다.

아시베쓰(홋카이도)=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