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서 일군 새 삶, 그 기억으로 세상 어루만지다

입력 2012-10-25 17:56


미국 9·11테러 직후 상처 입은 전 세계인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시가 있다. 2001년 9월 24일자 미국 ‘뉴요커’지에 실린 폴란드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67)의 ‘상처 입은 세상을 찬미하려 노력하라’가 그것.

“너는 상처 입은 세상을 찬미해야만 한다/ 네가 본 멋진 요트와 배들,/ 이들 중 하나만 먼 여행을 앞두고 있고/ 나머지에겐 소금기 가득한 망각만이 기다린다/ 너는 갈 곳도 없이 걷고 있는 난민들을 보았고/ 처형자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것도 들었다/ 상처 입은 세상을 찬미해야만 한다”(‘상처 입은 세상을 찬미하려 노력하라’ 부분)

9·11테러 발생 1년 반 전에 예감처럼 쓰인 이 시는 인류에게 숙명처럼 부과된 근원적인 슬픔을 표상하고 있다. 폴란드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명성을 이으며 현재 폴란드 문단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자가예프스키 시집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문학의숲)가 출간됐다.

자가예프스키는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르부프에서 1945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르부프를 포함해 국토의 4분의 1을 소비에트에게 빼앗긴 후, 한 나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자처럼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 시인의 기억 속에 신화화돼 남아 있는 ‘과거’의 르부프는 유년 시절의 순수한 추억이 깃든 노스탤지어의 대상이자 존재의 원형이 보존돼 있는 시원의 공간이다.

“왜 모든 도시는/ 예루살렘이 되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이제 오로지 서둘러/ 짐을 싸, 언제나, 매일매일/ 그리고 숨도 쉴 새 없이, 르부프로 간다, 사실 르부프는/ 복숭아처럼 편안하게 깨끗하게/ 존재하니까. 르부프는 어디에나 있다.”(‘르부프로 간다’ 부분)

1970년대 후반, 폴란드 사회주의 정부와의 마찰로 고국을 등진 그는 프랑스 파리와 미국 휴스턴을 오가며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어야 했다. 번역자인 최성은 한국외국어대 폴란드어과 교수는 “여행자의 이미지는 자가예프스키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모티브”라며 “인생의 고독한 여정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화두”라고 지적했다. “시가 없어져 버린 것은 긴 오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홀로/ 끈으로 묶은 몹시 무거운 가방을 들고/ 9월의 검은 비를 맞고 선 파리 북역의 가난한 여행자처럼/ 불투명한 도시의 악마와 마주하였다”(‘긴 오후들’ 부분)

첫 시집 ‘공보’(1972)에서부터 근작 시집 ‘보이지 않는 손’(2009)에 이르기까지 10여권의 시집에서 가려 뽑은 시선집으로 국내 초역.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