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박순영] 개혁은 단호하게 하는 것

입력 2012-10-25 18:43


중세기가 저물어가는 시대,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계속하기 위하여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면벌부(indulgentia:免罰符)를 팔기로 하였다. 이 업무를 맡은 도미니크파의 수도사 테첼(Tetzel)은 “돈이 헌금함에 ‘땡그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게 된다”라고 말하며 죽은 자들을 위한 속죄의 대금을 바치게 하였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설교를 하고 있던 마르틴 루터는 주후 1517년 10월 31일 정오, ‘비텐베르크 성곽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의 문에 95개 조항의 논제를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의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였다. 대학의 게시판으로 사용하던 교회의 문(門)에 “참된 회개만이 속죄의 길이며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주장하며 “면벌부는 결코 죄를 사하거나 징벌을 면하게 할 수는 없다”는 내용의 항의문을 붙였다.

참된 회개는 통회와 믿음

후일, 루터와 함께 멜랑톤이 작성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The Augsburg Confession) 제12조에서는 “참된 회개는 두 가지 부분으로 성립된다. 하나는 통회인데, 죄를 알게 되어 양심에 찔림을 느끼는 두려움, 또 다른 하나는 복음과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를 믿는 신앙이다”라고 말함으로 마르틴 루터의 개혁은 성경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성서적 개혁’이며, 오직 믿음으로라는 ‘신앙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황제에 의하여 소집된 스파이어 국회(Diet of Speier)에서 결정된 칙령은 ‘영주의 종교는 곧 백성의 종교(cuius religio, ejus religio)’라는 원칙으로 독일의 각 주로 하여금 지배자의 종교를 따라야 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 판결에 대하여 복음주의적 소수파는 어떤 국회도 종교문제에 있어서 개인의 양심을 속박할 수 없다며 항의하였고 그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항의자들)’란 이름으로 불렀기에 여기에서 개신교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기원전 3000년쯤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집트 벽화에는 혁(革)자 모양으로 가죽을 펴서 무두질을 하는 광경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개혁(改革)이란 말에 들어가 있는 문자 ‘혁(革)’은 ‘피(皮)’와 함께 가죽(皮革)을 가리킨다. 피(皮)는 털이 그대로 붙은 날가죽(毛皮)을 말하는데 두텁고 무거우며 끈적거릴 뿐 아니라 그대로 마르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굳은 날가죽으로는 의복이나 장신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없다. 이런 날가죽을 끓는 물에 삶고 무두질을 하여 털을 밀어내고 기름을 빼서 부드럽게 가공을 하는데 이런 공정을 거친 가죽을 혁(革)이라는 문자로 표현한다. 세게 두드리고 펴서 말리는 단계를 잘 거쳐야 주름이 없고 부드러운 가죽(革)이 되어 사용하기에 편리한 신(靴), 끈(靷), 채찍(鞭), 안장(鞍) 등을 만들 수 있다. 고대 성경의 사본은 대부분 부드럽게 가공된 양의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나 꿰어 만든 책(렘36:4)에 먹으로 쓴 것이었다. 그래서 문자 혁(革)이 들어가 이루어진 낱말은 혁명(革命), 혁신(革新), 혁파(革罷), 변혁(變革) 등에서 보듯 대부분의 단어가 예외 없이 과격한 변화를 느끼게 한다.

고통 감수하는 변화 필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점진적 변화론, 안정과 성장 우선주의로는 개혁정신을 이을 수 없다. 칼로 도려내는 단호함, 삶아 내는 과정의 인내, 펼쳐 두드리는 고통을 감수하는 과격한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오늘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495년 전 개혁되었던 교회는 오늘날 오히려 개혁의 대상일 수 있다. 495년 동안 계속되는 개혁정신으로 살아야 진정한 개신교일 수 있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과 우리의 교회는 과거완료형 개신교인가, 현재 진행형 개신교인가?

박순영 장충단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