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지루한 선거
입력 2012-10-25 18:43
우리나라 유권자는 선거에서 지지후보를 바꾸는 데 최소 2주(週)가 걸린다고 한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야당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후보 지지율이 변한다는 건 유권자 개개인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해온 말을 바꾸는 것이다. 어제까지 문재인 좋다던 사람이 오늘 안철수가 좋다고 말할 때 지지율에 변화가 생긴다. 함부로 그렇게 말을 바꾸면 주변에서 신뢰 못할 사람이 돼 버린다. 왜 바꿨는지 설명할 명분이 있어야 하고 그 명분이 쌓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2주다.”
그의 지역구 유권자들은 역대 총선에서 여야 후보를 번갈아가며 당선시켰다. 선거마다 접전이 벌어지는 판에서 조금은 변덕스런 유권자와 부대끼며 ‘숙려기간 2주’의 여론 변화 공식을 얻었다고 했다.
이번 대선은 이 공식이 비교적 잘 들어맞을 상황이다. 과거 어느 선거보다 부동표(浮動票)가 적다. 강력한 제3후보가 등장하면서 여론조사 무응답층은 한 자릿수로 줄었다.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다른 후보 지지자를 빼앗아오는 수밖에 없다. 유권자가 말을 바꿀 수 있게 해줘야 판이 바뀐다.
선거는 5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2주 공식을 대입하면 후보들이 판을 바꿔볼 기회는 많아야 세 번, 적게는 두 번 남았다. 적어도 2주 동안은 입에 오르내리며 지지후보 교체의 명분이 돼줄 이슈가 필요하다. 오늘 그런 이슈를 던진다면 지지율은 2주 뒤에 출렁인다. 각 후보 진영은 매일 2주 뒤를 겨냥해 전략과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주 들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야권 후보 단일화와 직결된 정치 쇄신안을 놓고 정면 출동했다. 두 후보가 지금 이 이슈를 꺼냈다는 건 2주 뒤, 11월 초면 단일화와 관련해 뭔가 벌어질 것이란 얘기다. 단일화는 이미 예상돼 온 터라 그다지 신선하진 않지만 어쨌든 두 후보는 판을 바꿔볼 ‘2주짜리 이슈’로 정치 쇄신을 택했다.
이것 말고는 판을 흔들어보겠다고 던지는 이슈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아 이번 선거는 독특하다. 이상할 정도다. 지금까지 지지율을 출렁이게 만든 건 안철수의 등장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논란이 전부였다. 여론조사마다 3자 지지율은 박근혜>안철수>문재인, 박·문 박·안 양자대결은 오차범위 내 접전 양상으로 굳어진 지 오래됐다.
누구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이 구도를 깨뜨리고 싶을 법한데 어느 후보도 선뜻 치고나가려 하지 않는다. 세 후보가 엎치락뒤치락 정책을 발표하지만 비슷비슷하다. 2002년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이나 2007년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같은 트레이드마크 공약은 찾아보기 어렵다.
새누리당이 잔뜩 별렀다는 안철수 검증도 아직 별다른 게 없고 국정감사장을 시끄럽게 한 네거티브 공방은 이미 나왔던 얘기의 재탕에 그쳤다. 많은 평론가들이 치열한 중도 쟁탈전을 예상했지만 요즘 각 후보 진영은 거꾸로 ‘집토끼’ 단속에 더 신경을 쓴다.
선거가 지루하다. 종반전에 접어들지만 지금까지 유권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후보가 있던가. 후보들이 몸을 사리거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권자가 나서야 한다. 미국 대선판은 TV토론 한방에 뒤흔들렸다. 아직 한번도 열리지 못하고 있는 TV토론을 요구해야 한다. 유권자는 세 후보를 저울질할 권리가 있다.
태원준 정치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