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36) 고양이와 함께 황홀한 산책… 시인 이민하

입력 2012-10-25 17:55


차갑고 무심한 아버지 영향

시는 세계의 사생활 같은 것


한 소녀가 있었다. 전북 전주 평화동에서 태어난 소녀. 병무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이사가 잦았던 어린 시절엔 골목이 자주 바뀌었고 초등학교를 세 곳이나 다녀야 했다. 친구들의 이름은 물론 낯선 길을 외우는 게 일상이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만 집은 세 번 바뀐다. 자주 길을 헤맸기에 아예 수업을 빼먹고 산책을 하다 귀가하곤 했다.

법대 출신으로 학구열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젊은 시절, 고학으로 고시준비를 하던 중 얻은 폐결핵으로 자주 아팠고 생계수단으로 화투장 그림을 그리던 손재주를 감출 수 없어 늘 그림을 그렸다. 소녀는 낙천적이며 사교적이던 엄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 냄새보다, 늘 외롭고 병약해 보이던 아버지의 유화물감 냄새에서 ‘더 진짜 같은’ 사람 냄새를 맡았다.

소녀는 시인이 됐다. 이민하(45). 지난 9월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한 그는 자전에세이에 썼다. “차갑고 무심했던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친해지기도 전에 엄마가 세상을 떠난 탓인지 제 시에는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아 즐길 만한 음식 냄새는 배어 있지 않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건 대학 시절이었다. 어렸을 땐 엄마하고도 비밀 얘기를 나눠보질 못해서 항상 외로웠다가 이제 겨우 친해질 수 있는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실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중략)//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 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세상의 모든 비밀’ 부분)

그에겐 자신의 고민과 상처를 들어줄 그만의 언어가 필요했다. 혼자인 때와 혼자가 아닌 때 사이의 괴리감에 대해 예민한 사춘기 시절, 서울로 이사 오면서 죽음에 대한 의식이 강해졌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이 정말 많이도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그들의 죽음을 빼앗아 연명하는 거라는 죄책감에 시달릴 정도였다. 악몽과 가위눌림이 많았고, 현실과 꿈,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깨어 있는 중에도 꿈을 꾸고 잠자는 중에도 의식은 깨어 있었다. 환상은 그에게 현실의 일부였다. 2000년 ‘현대시’로 등단해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등의 시집을 펴낸 그가 대표적 환상파 시인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이유이다.

등단 이후 분가해 지금은 서울 강남 한복판인 신사동 주택가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기거하는 그는 말한다. “고양이는 골목의 사생활입니다. 그리고 시는 세계의 사생활입니다. 길 위에는 산책하는 시, 굶주린 시, 낮잠을 즐기는 시, 병에 걸린 시도 있고, 집 안에는 사람들이 떠받드는 시, 갇혀 버린 시도 있습니다. 그러다 사람들 모르게 탈출하는 시, 사람들 모르게 죽어가는 시들이 있습니다. 거리에는 시가 넘치지만 세계의 화합이나 질서나 품위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는 세계의 사생활을 지켜줍니다. 그것이 시가 공동체에 가담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사생활에서 개인의 취향을 구현하는 것이 ‘놀이’이고, 이것을 언어라는 공감대 속에 풀어 놓는 것이 ‘시’라는 얘기이다. 고양이들은 시처럼 돌발적으로 식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날엔 발톱을 세워 할퀴기도 한다. 그리고 고양이의 본능으로 골목을 산책하다 보면 세상의 비밀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렌즈를 맞추었다 눈을 깜박이던 어머니가 벽에 걸렸다 액자 속에서 어머니는 두 팔을 바닥으로 길게 내리뻗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쌓인 사진들을 비집고 가위를 집어 올렸다// (중략)// 어머니의 가위를 피해 습자지처럼 얇아진 나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창가에서 떠돌다 끈적한 천장에 들러붙었다 난자당한 사진들 속에 흩어져 있던 나의 눈들이 천천히 걸어 나와 나를 찍었다”(‘사진놀이’ 부분)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