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규태 (5) 탕아에게 거듭 태어남을 주신 주님의 뜻은?
입력 2012-10-25 23:49
문예지의 주간이며 한의사이기도 한 Y시인은 “‘누가복음(15장)의 비유처럼 이 탕아의 돌아옴은 분명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쓰시기 위해서 베푸신 은총입니다. 저 세상 사람으로 치부한 지 10여년 만이니까,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데다 다른 장기로 전이까지 된 췌장암 환자가 극적으로 살아난, 현대의학으로는 거의 못 고친다는 시한부 3개월의 기가 막힌 선고를 받고도 오히려 동안으로 돌아온 이 기적, 이건 분명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날 내 간증을 듣고 한 시인은 “언제였지 어두운 파멸의 그림자가 순진한 소년 같은 선생님을 덮친 것이…. 그리고 마치 제3세계로 떠난 듯 일절 소식을 몰랐다. 그래도 서울은 늘 소문으로 가득했다. 역시 그는 루머의 근원지를 벗어나지 못했고 문인들의 관심도 끝내지 못했던 것이다. 지독한 병마와 눈물어린 외로움을 이겨 낸 선생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렇게 조용히 우리 곁에 돌아 오셨다. 하나님의 신비한 배경을 등에 업고서….”
그는 고즈넉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상하고 따뜻하게 들려주는 그의 뜨거운 간증은 극한의 상황을 극복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사유와 믿음으로 가득해 경이롭다. 삶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노시인답게 서정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풀어나가 설득력도 있고 아름답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마련된 즉흥적인 이 귀환 축하 모임이 선생님의 진정한 성인식이 될 것만 같다.”
이날 모인 문우들은 거의가 환갑을 넘긴 이들이어서 세월이 흐르면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와병 중이신 데도 부축을 받고 가까스로 오신 전숙희 선생님도 ‘재생’ 또는 ‘거듭 태어남’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셨다.
거듭남에 이르는 갈림길은 시련과 유혹이 닥쳐올 때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와 지옥 양방에서 사람을 끌어들이려 할 때인 것이다. 이 시련을 넘어 ‘나쁜 사랑’은 ‘좋은 사랑’에 복종하게 되고 여기에 하늘나라의 빛이 비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인류에 대하여 완전한 행복을 약속하셨고 마련해 놓으셨다. 시편 119편 72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나는 역경을 통해 비로소 그 약속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나는 과연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라는 물음으로 괴로워했다. 딴은 이는 인간이 반성 능력을 갖추게 된 이래 줄곧 갖게 된 오랜, 그리고 끊임없는 명제이겠다. 철학의 양대 축인 존재론과 인식론도 이런 물음에 대한 영원한 궁극의 확장이라고 하겠다.
그러다가 끝내는 ‘죽게 되면 모든 게 그만이 아닐까…’라는 어리석은 결론을 내리고는 스스로 질문을 닫아 버리곤 했다.
늙어갈수록 마음이 어려진다고 말한다. 마음이 순구해질 뿐만이 아니라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져야 한다. 그 새로운 것, 그 아름다움이 지닌 소중함을 깨우쳐야 한다. 나이가 들면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제각기 역할이 다른 두 손이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손은 스스로를 위한 손이고, 다른 하나의 손은 남을 위한 손인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여생을 보냈으면 한다. 그런 사랑은 무진장으로 줄 수 있는 자본이다. 사랑을 받는 이는 주는 이에게도 기쁨을 주게 마련이다. 이처럼 주어서 내가 좋고 받는 이도 좋은 사랑으로써 해결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날 모임의 사회자는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하나님이 불러들였다가 다시 내보낸 그의 남다른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과 연민, 희열 등을 한꺼번에 안겨 줍니다. 나는 이 마무리 말에 덧붙여 ‘시편 100편 1∼5절’을 낭독했다. 그러고는 감사의 기도를 뜨겁게 올렸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